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사막에 숲을 가꾸며 노동선(勞動禪)을 하다 - 운월 스님 편|슬기로운 수행 생활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사막에 숲을 가꾸며
노동선(勞動禪)을 하다
운월 스님 편

함영 작가

사막을 배경으로 한 ‘우리절’ 경내 불상

특전사 출신 스님의 특별한 수행과 만트라
며칠 전 이웃 마을의 개가 퓨마에게 물려 죽었다. 이곳에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퓨마를 비롯해 코요테와 곰 등의 야생동물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LA 카운티 외곽에 위치한 1,200m 고산에 펼쳐진 사막. 이곳에서부터 모하비사막이 시작된다. 뒤로는 해발 3,000m의 더 높은 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우리절’이라는 작은 절이 있다. 절 주위 1km 반경에 살고 있는 사람은 오직 이 절의 운월 스님뿐이다.

“향수병이라든가 외로움을 탄다면 애초에 이런 데서 혼자 못 살죠. 다만 어려움이 있다면, 지금 불사를 혼자 하고 있다 보니 일손의 필요성을 느낄 때예요. 불상 하나 놓기 위해서는 받침대도 만들고 기초공사도 해야 하는데, 꼬마들 손이라도 필요한 순간이 있거든요. 그때 말고는 혼자 지내기 조용하고 좋은 곳이죠.”

생과 사의 경계가 일상처럼 스며 있는 야생의 거친 사막에서 스님은 홀로 작은 숲을 일구고 있다. 경내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 수련을 키우고 다양한 형태의 불상을 만들어 불상 공원까지 조성 중이다. 그러기에 그의 수행은 고요한 법당에서만이 아니라, 삽자루를 쥐고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절을 완성해가는 노동 속에 있다. 그러한 덕에 ‘우리절’에 들어서면 사막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해진다. 약 9,900m2(3,000여 평)에 이르는 경내에 200그루가 넘는 다양한 나무와 꽃, 수련 등이 건조한 바람 속에서도 푸른 기운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이곳과 인연이 된 날로부터 시작된 운월 스님의 생명의 기록들이다.

“사막에 숲 하나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평소 제 신조가 ‘안 되면 되게 하라’예요.(웃음) 그래서 지금까지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요. 매사 복잡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고, 또 복잡하게 생각할 일도 사실 없죠.”

출가 전 스님은 특전사였다. 8년간 복무하며 몸에 밴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가 출가 후 삶에서도 스님의 길잡이이자 수행을 지탱해주는 만트라가 되었다.

법당 겸 요사채
야단법석 법문

해가 뜨면 ‘워킹(working) 명상’,
별이 뜨면 ‘워킹(walking) 명상’
4월부터 11월까지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마른 땅. 한낮 기온이 섭씨 40℃를 우습게 넘나드는 불볕더위 속에서 나무를 가꾸는 일이란 불가능에 대한 도전과 같다. 스님의 하루하루는 그러한 도전을 집착 없이 행하는 노동선(勞動禪)의 연속이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예불을 마치면, 해뜨기가 무섭게 밖으로 나가 한 시간 반 동안 물을 준다. 지하수가 탱크로 연결되어 있어 그 물을 사용하고 있다. 나무의 태생과 특징에 따라 물 주는 법도 제각각이라 온전히 집중해 나무들과 교감하며 물을 주어야 한다. 오후 5시경 이른 저녁 공양을 마치면 다시 두 시간 넘게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 선사의 말씀처럼 일하는 자체가 스님에겐 곧 수행이다.

고된 노동이 끝나고 어둠이 내리면, 사막의 하늘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펼쳐낸다. 높은 해발 덕에 보석 같은 별들과 은하수가 쏟아질 듯 빛을 내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황량했던 사막이 경이롭고 신비한 우주의 일부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그 시간이면 스님은 도량을 돌며 걷기 명상을 한다.

“걷기 명상을 처음 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제식훈련처럼 구령을 붙이게 해요. ‘하나’에 오른발, ‘둘’에 왼팔 하는 식으로 자기 페이스에 맞게 걸으며 구령에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줄어들죠. 그게 익숙해지면 나중엔 구령을 떼도 편하게 걷고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명상 상태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죠. 염불선을 할 때 빠르게 주력하는 것도 이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어요. 제 경우는 매일 사시기도 때 『금강경』을 3독씩 하는데, 보통 1독 하는데 걸리는 시간 내에 3독을 하죠. 그래서 글보다 입이 먼저 가 있곤 해요.(웃음) 그렇게 빠르게 독경하며 몰입하면 잡생각이나 산란한 마음이 끼어들 틈이 없죠.”

낮에는 노동을 통한 ‘워킹(working) 명상’으로, 밤에는 걸음을 통한 ‘워킹(walking) 명상’으로, 운월 스님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하루가 그렇게 또 지나간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과 은하수를 차마 두고 들어갈 수 없어, 여름에는 아예 그 아래 잠자리를 펴고 취침에 든다.

운월 스님 법회 모습

머문 바 없이 그저 지금, 여기에서
스님은 타고나길 그야말로 ‘군대 체질’이다. 머리 굴리며 살아야 하는 사회생활보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생활이 마음 편하고 체질에 맞아, 일찍이 진로를 특전사로 택했다. 하지만 군 생활 동안 수없이 마주해야 했던 죽음은 20대 청년의 삶에 깊은 화두를 던졌다.

“특전사는 훈련 중 사고가 잦고, 온갖 죽음과 시신을 접하게 되죠. 낙하산 사고로 형체도 없이 사라진 전우들도 여럿 있었고, 행군 중 자살했거나 부패한 시신을 접하는 경우도 다반사였죠. 봉사 차원에서 익사한 민간인들 시신을 찾아 수습해야 하는 일도 많았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조금 전까지도 함께 훈련했던 동료가 처참한 죽음을 맞을 때였죠. 그런 경험이 출가에 영향을 미친 부분도 분명 있지만, 그때 종교 생활하면서 조용한 암자에서 기도하며 소박하게 사는 삶이 가치 있고 좋아 보였어요.”

제대 후 부모님의 반대로 곧바로 출가하지 못한 스님은 한동안 체육관을 운영하며 지냈다. 당시 격투기며 복싱, 태권도, 합기도 등 안 해본 운동이 없다. 그렇게 4년간의 시간을 보류한 뒤 서른 초반에 청량사에서 출가를 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는 올해로 16년째가 되어간다. 처음 7년간은 청화 큰스님이 창건한 삼보사에서 청소년들의 포교지도사로 활동했다. 특전사와 체육관 시절의 경험 덕에 아이들과 캠핑하고 하이킹하며 불법을 전하고, 겨울 캠핑의 노하우 등을 알려주며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우리절’을 개원한 것은 코로나19 때의 일이다. 그전까진 북가좌주의 상가 건물에 세를 들어 포교당을 운영했는데, 미국은 상가 건물 내 주거를 엄격히 금하는지라 저녁 6시만 되면 바깥출입을 일절 하지 않고 검은 커튼을 치고 지냈다. 월세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때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인연이 된 사막의 땅, 작은 절이 언제부터인가 입소문을 타 샌프란시스코나 다른 주의 사람들도 찾아오는 힐링 공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사 출신다운 남다른 만트라 외에 스님에겐 신도들에게 늘 강조할 만큼 깊이 새기고 애용하는 만트라 같은 경구가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구절이다.

“알고 보면 세상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집착에서 비롯되잖아요. 좋은 것도, 가지지 못한 것도, 미워하는 마음도 집착이 되면 괴로움이 되죠. 그에 대한 짧고 명확한 해답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있어요. 무언가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엔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평안하고 자유로운 상태가 있을까요? 결국 모든 경전의 가르침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귀결된다고 생각해요.”

황량한 사막에서 숲을 일구는 스님의 수행 또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행(行)이 아닐는지…. 사막에서 이 나무들이 살 수 있을까, 이 불사가 언제쯤 끝날까, 하는 마음에 머무름 없이 오늘 파야 할 땅을 파고, 오늘 주어야 할 물을 주며 그저 지금, 여기에서, 온 마음을 다할 뿐!


함영|1998년부터 글을 지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고, 『빅이슈 코리아』에서 편집장을 지냈으며, 글짓기와 기획 및 출판 등으로 곰탕을 끓여 꽃을 꽂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스승들이 납시어 어른스크림을 사드리다』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