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온 힘을 다해 웃는 이유|나의 불교 이야기

부처님이 온 힘을 다해
웃는 이유

이필
시인


최초의 기억

한국의 삼대 오지라 불리던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백산 자개봉에서 뻗어내린 능선, 그 한 자락의 햇살 가득한 언덕에 자리를 잡아, 사람들은 그곳을 양지마을이라 불렀다.

한낮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이면, 종종 매 한 마리가 마을 위로 나타나곤 했다. 높이 떠올라 허공을 빙빙 도는 매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놀던 아이들은 “매가 떴다!” 하고 외치며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구는 정짓간의 그늘로, 누구는 뒤꼍의 담장 너머로 황급히 몸을 감추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이였다. 언니의 등에 업힌 채, 매의 발톱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야 했다. 그 작디작은 몸으로도 알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이란 뜻밖에도 가볍고 가까운 바람결처럼 언제든 스쳐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갓난쟁이였던 나는 그렇게 포대기에 싸여 언니 등에 업혀 매의 발톱을 피해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하곤 했다.


폭류를 거슬러 만난 불교

내가 통도사 백운암에 찾아간 것은 2006년 초여름이었다. 어머니가 큰 병에 들어 기도발이 성하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불공을 드릴 생각이었다. 그 무렵 청정승가 운동을 하시던 만초 스님이 조계종 중앙 승가에서 물러나 암자에 머물고 계셨다.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한참을 달린 뒤에야 백운암 주차장에 닿았다. 거기서 다시 가파른 바윗길을 3km 정도 올라야 했다. 새벽 여섯 시, 사위는 캄캄했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동이 틀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고요한 어둠은 오래도록 이어졌고, 어둠 끝에서 서서히 번져오는 빛이 내 앞의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했다.

암자는 해발 750여 미터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이튿날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암자 밖 토굴을 둘러보려던 일정은 자연스레 취소되었다. 영축산 정상에서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암자 밑에 함수되어 절간 전체를 흔들었다. 장마로 시작된 암자 생활은 무료하고 적적했다. 나는 오직 어머니 생각에 사로잡혀 충격과 우울로 굳어 있었다.

스님께서 부르셨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풍경을 가리키며 어떠냐고 물으셨다. 나는 잠시 바라보다가 “평화롭습니다”라고 답했다. 스님은 잠시 더 오래 바라보라 이르고는 곧장 방을 나가셨다. 한참 뒤에 돌아온 스님은 풍경이 이번에는 어떻게 보이느냐고 재차 물으셨다. 나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물음을 고쳐 던지셨다.

“자네는, 왜 그토록 슬픈가?”

불교의 언어, 시의 언어 -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스님의 법문은 이어졌고, 나는 꼼짝없이 세 시간 반을 붙들려 있었다. 어린 시절 잠재되어 있던 매의 그림자가 머릿속에서 다시 어른거렸다. 사나운 매의 부리에 물려 공중을 휘감기는 기분이랄까,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쳐 허탈해진 기분이랄까. 어제 신었던 신발이 한밤 사이에 작아진 듯 답답하고 낯선 감각이 온몸을 스쳤다.

그 순간, 내가 흘려보낸 사람들과 동물들, 사물들의 이름이 하나둘 역류하듯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겹쳐지며, 나는 비로소 찰나의 깊은 울림을 경험했다. 불교와의 첫 만남이었다.

끔찍하죠, / 철쭉과 산댓잎의 고장에서 태어나 / 본의 아니게 꿈은 자라고 / 제 무덤을 파고 불상의 머리를 함께 묻어 봤으면 /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 돌을 쪼개 손을 밀어 넣어요 / 돌의 심장을 꺼내요 // 사과밭은 끝장이고 사과꽃잎은 무너졌습니다 (졸시 <부석사> 중에서)

그 후 나의 불교 체험은 조계사 불교대학으로 이어졌다. 언 강이 풀리고 떨어진 풀씨가 아무 데서나 뿌리를 내려 자라듯, 간화선을 지나 티베트 밀교의 진언 수행을 거쳐, 어느덧 초기 불교 공부 모임에서 도반들과 함께하고 있다. 만초 스님을 시작으로, 틈틈이 문광 스님, 각묵 스님, 디파마 스님, 타니사로 스님의 법문과 강론을 들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책을 만들었고 시를 썼다.

시를 쓰다 보면 종종 미묘한 알아차림이 있다. 정수리에 돌을 올려놓은 듯 고요한 긴장 속에서, 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굳이 말로 드러내려 한다. 자음과 모음이 빚어내는 소리의 결은 언제나 섬세한 음악을 낳는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언어를 넘어서는 미묘함이 있다. 그래서일까. 확철대오한 옛 선사들은 깨달음의 경계를 드러내 보일 때 시의 운율을 빌려 쓰지 않던가. 오도송, 그것은 곧 불교의 오랜 전통이자 살아 있는 법문이었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길고 넓은 혀”를 지니셨다고 전한다. 이는 부처의 32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특별한 신체적 특징이다. 그 혀는 마치 소의 혓바닥을 닮았다고 한다. 어미 소가 새끼를 핥아주듯, 부처님의 혀 또한 다정한 말과 따뜻한 언어로 서로를 돌보라는 뜻을 품고 있을 것이다. 불교의 언어는 어쩌면 이와 같은 것이리라. 나 또한 불교로부터 언어로 대중과 소통하고 변화로 향하는 초대장을 받은 셈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온 힘을 다해 웃는다
문학 잡지에 시를 발표하면 가끔 이 시가 무슨 뜻이냐고 심심찮게 물어온다. 그럴 때면 난감한 입장이 되곤 한다. 얼른 해답을 내놓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교가 지닌 깊은 어려움 또한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 “법은 태어나지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절대적으로 공하고, 말로 표현할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만 방편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현상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체험은 언어로 온전히 담아내기 쉽지 않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으신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관 밖으로 잠시 맨발을 내밀어 보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온 힘을 다해 웃는 이유. 글을 쓰는 호젓한 밤이면 나는 부처님의 그 웃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필|1972년 소백산 기슭, 오지마을에서 태어났다, 201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도서출판 사슴뿔의 편집장으로 있다. 2019년 웹진에 세계 여성 시인들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고 2024년 『경남일보』 경일춘추에 칼럼을 연재했다. 매주 도반들과 함께 초기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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