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중에서|다시 읽는 경전

『수심결(修心訣)』 중에서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 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한 물건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하시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생각도 다 여래의 밝은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들이며,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바탕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만 떠나면 곧 당당한 부처다. (중략)


◦ 질문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이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단박 깨달음[頓悟]이라면 왜 차츰 닦을[漸修]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차츰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단박 깨달음이라고 합니까?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주소서.

● 대답  범부가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성(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習氣)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갓 태어났을 때 모든 감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 질문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 대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해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러 또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애써 알려고 하면 곧 알 수 없으니 다만 아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 질문  상상(上上)의 뛰어난 사람은 들으면 쉽게 알지만 중하(中下)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이들도 알아듣게 해주소서.

● 대답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그대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으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런 앎(靈知)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空寂)하고 영지한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다.

이 마음만 깨달으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를 올라 걸음마다 삼계를 뛰어넘고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自利) 이타(利他)를 갖추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그대가 이와 같다면 진짜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 질문  제 분수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공적 영지의 마음입니까?

● 대답  그대가 지금 내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한 마음인데, 어째서 돌이켜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는가. 내 이제 그대의 분수를 따라 바로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 테니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잘 들으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만약 이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이 일단 죽게 되면 몸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혀는 말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며,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를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는 그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한 작용[妙用]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로다’라고 한 것이다. 또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길을 가리켜 근원에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지금 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보라. 거기에도 많은 소리가 있는가?”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기를,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허공과 같지 않은가?”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실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미 모양이 없는데 어디에 크고 작음이 있겠으며, 크고 작음이 없는데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안팎이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으므로 피차(彼此)가 없다. 피차가 없으므로 가고 옴이 없으며,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고, 생사가 없으므로 옛날과 지금이 없으며, 옛날과 지금이 없으므로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으므로 범부와 성인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으므로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므로 모든 이름과 말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없어지니 모든 감관과 대상과 망념, 나아가서는 갖가지 모양과 온갖 이름과 말이 다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본래부터 공적하고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아 무정(無情)한 것과 같지 않고 성품이 스스로 신기롭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한 청정한 마음의 실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원 각성(本源覺性)이다. 이것을 깨달아 지키는 이는 그대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자는 육도(六途)에 나아가 한량없이 헤맬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한 마음이 어리석어 육도로 나아가는 자는 가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사람이며, 법계(法界)를 깨달아 한 마음으로 돌아온 이는 오는 사람이고 고요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다. 그래서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이라고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고 해서 덜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성인의 지혜에 있어서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 있어도 어둡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성인이라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 해서 덜하지도 않는다면, 부처님과 조사가 보통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보통사람과 다른 점은 스스로 그 마음을 살피는 데에 있다.

그대가 이 말을 믿고 의문이 단박 풀리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진정한 견해를 일으켜서 몸소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궁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음 닦는 사람의 알아 깨닫는 곳이고, 따로 계급과 차례가 없기 때문에 돈(頓)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인(因) 중에서 부처의 과덕(果德)에 계합하여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룬다’고 한 말과 같다.    



* 이 글은 『통일불교성전』(대한불교진흥원 통일불교성전편찬위원회 편찬, 대한불교진흥원 刊, 1992년) 제10장 「수행신심부」 4. 수심결 중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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