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학은
어디로 가야 하나
장영우
문학평론가·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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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된 부석사 전경 |
한국 소설에서 연기·윤회 모티프와 함께
가장 빈번히 활용되는 불교 모티프는 승려와 사찰
초기 리얼리즘 이론에 따르면, 근대소설(novel)은 현실 세계를 정확히 반영한다. 하지만 소설은 실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사할 수 없으며, 작가 또한 그럴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루카치는 그 원인을 소설이 모사할 대상이 되는 모든 원형이 몰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애초부터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하거나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실제 현실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그러나 현실이라 여겨지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상현실을 실재로 받아들이게 하는 근본 동인은 ‘개연성’의 원리다. 흔히 ‘그럴듯함’으로 번역되는 이 원리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수많은 조건의 결합에 따라 생성된다는 상호의존적 관계론(인과론)에서 기인한다.
인과론에 따르면 이 세상 만물 가운데 영원불변한 존재는 없고[諸行無常], 독립적 실체도 없다[諸法無我]. 내가 고정적·독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은 주체와 객체의 절대적 평등을 전제로 한다[自他不二]. 주체와 객체, 또는 중생과 나의 관계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결국 자아와 세계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인식과 상통하는데, 이처럼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지 않고 평등한 관계로 보는 연기론은 ‘자비(慈悲)’라는 아름답고 숭고한 실천 행위를 통해 구체화된다.
연기론이나 윤회설은 불교의 근본정신을 대중들에게 쉽게 전파하기 위한 방편 가운데 하나다. 연기론이나 윤회설 등의 이론적 방편이나 자비와 보시 등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깨달아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다. 연기·윤회 모티프가 우리 문학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널리 활용된 것도 그런 사정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구운몽』의 양소유가 여덟 여인을 차례로 만나 2처 6첩으로 삼는 것은 성진(性眞)이 여덟 선녀를 만났던 인연의 결과이며, 『흥부전』의 놀부가 징벌을 받는 것도 악업을 지은 당연한 귀결로 이해된다.
한국 소설에서 연기·윤회 모티프와 함께 가장 빈번히 활용되는 불교 모티프는 승려와 사찰이다. 우리 서사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전(傳)’ 양식이 발달해왔다. ‘승전(僧傳)’은 중국 양(梁)나라의 혜교(慧皎)가 지은 『고승전』이 가장 오래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의 고승 각훈(覺訓)이 왕명을 받아 기술한 『해동고승전』과 일연의 『삼국유사』에 전하는 「고승열전」이 널리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 문학 속에 승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례는 『이차돈의 사』·『원효대사』 외에 달리 찾기 어렵다. 해방 후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아 『등신불』(1961)이 대표적 불교 소설로 평가되다가 『만다라』(1978)가 발표되면서 불교계와 문학계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주인공 지산과 법운 등 대조적인 승려상의 원형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자장, 노힐부득/달달박박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하는데, 자장·달달박박이 계율에 엄격한 수행자의 강직한 이미지를 대표한다면, 원효·노힐부득은 여성과의 육체적 접촉도 마다하지 않는 자재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만다라』와 『아제아제바라아제』가 작가 자신의 직접적 체험 또는 평소의 불교관을 허구화한 작품이라면, 『길 없는 길』은 경허 선사의 일대기를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와 함께 우리 소설에서 작중인물의 갈등을 해결하고 화해에 이르는 장소로 사찰이 활용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별사」(오정희), 「그녀의 세 번째 남자」(은희경), 「상춘곡」(윤대녕), 「민둥산에서의 하룻밤」(김형경), 「부석사」(신경숙) 등에서는 현실에서 갈등을 겪는 남녀가 사찰을 찾아 마침내 마음을 정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하산하는 스토리라인을 따르고 있다. 이들 작품을 굳이 불교 소설로 유형화하기는 어렵지만, 사찰이 화해와 해결의 공간으로 즐겨 사용되는 점은 한국 현대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하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 등 세 편의 중편소설이 한 편의 장편소설로 읽힐 만큼 작중인물과 사건의 연계성이 긴밀하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영혜’지만, 「채식주의자」에서는 ‘나(남편)’, 「몽고반점」에서는 ‘그(형부)’, 그리고 「나무불꽃」에서는 ‘그녀(인혜)’가 초점 화자로 등장해 ‘영혜’의 행동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기술된다. 요컨대 「채식주의자」는 실제 주인공인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고 마침내 식물로 변하는 과정 대부분이 외부 관찰자의 시각으로 서술·묘사될 뿐 ‘영혜’의 말이나 생각은 극히 제한적으로 제시되는 독특한 시점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영혜’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행동을 넘어서 종국에는 영양분 섭취를 일절 중단해 식물처럼 고사화(枯死化)하는 과정이 핵심 서사를 이루고 서술자는 오히려 위성 인물로 밀려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 행위의 문화적·문학적 의미를 불교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2017년 맨 부커상 수상작 『바르도의 링컨(Lincoln in the Bardo)』은 미국 대통령 링컨의 참척을 다룬 소설이다. ‘바르도’는 티베트 불교 용어로 “죽은 영혼이 사후 세계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 즉 ‘중유(中有)·중음(中陰)’을 가리킨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 해(1862년) 열한 살 된 아들을 잃은 링컨은 수시로 묘지에 가 아들의 주검을 안고 오열한다. 조지 손더스는 이 이야기를 듣고, 미처 저승에 가지 못한 망령을 등장시켜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내게 한 뒤 진정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서사를 창작한다. 이것은 마치 불교의 사십구재 혹은 무속의 지노귀굿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작가 스스로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독자가 있을까?” 걱정했을 만큼 이 작품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맨 부커상 심사위원은 “완전히 독창적이며 위트 있고 지적이며, 지극히 감동적인 내러티브”라고 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손님』·『바리데기』에서 지노귀굿 등 무속을 도입하자 리얼리즘과 상치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죽은 자의 영혼이 일정 기간 중유 세계에 머물다 저승으로 간다는 것은 대다수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소설에서 다루지 않는다(못한다). 우리 문학계의 리얼리즘 입김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증좌다.
한국 문학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교적 리얼리즘’ 인정하고 발전시켜야
작금 한국 문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이 고조하고 있다. 그들이 궁금해할 한국 문학(문화)은 ‘서구적’인 것의 모방이나 흉내가 아니라 ‘한국적’인 것일 테다. 그리고 불교문학은 가장 한국적인 정신과 사상을 보여줄 수 있는 제재(주제) 가운데 하나다. 서구에서 중유 세계를 다룬 소설이 높이 평가되는데, 우리는 근대 리얼리즘 이론에 주박되어 불교적 상상력을 적극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장르문학이나 TV드라마 분야에서 이런 금기를 깨뜨리고 있어 다행이거니와, 한국 문학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교적 리얼리즘’을 인정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1960년대 남아메리카 소설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바 있는데, 우리라고 ‘불교적 리얼리즘’을 주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근대 리얼리즘 이론이 대두한 게 언제인데 우리는 지금도 그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바리데기』 등이 서구어로 번역되어 상당한 평가를 받은 만큼, 한국 고유의 불교적 정신과 관습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상상 세계를 구현한 작품이 조만간 출현하길 기대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만이 아니라, 중음 및 사후 세계, 더 나아가 환생이나 윤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면 소설의 외연이 훨씬 확장되고 내포 또한 심화될 게 자명하다. 『심청』이나 『바리데기』 등 고전 서사의 현대적 재해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데 반해 아직까지 현대판 『구운몽』이 창작되지 않은 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과 꿈의 상관성을 이 작품처럼 활달하고 박진감 넘치게 탐구한 작품은 동서를 통해 예를 찾기 어렵다. 지역·인종·계층 간 빈부 갈등이 극심해지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비와 상생의 불교 정신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를 문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사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고차원적 가상현실 창조도 불가능하지 않다. AI가 우리 일상 깊숙이 침윤한 오늘날 불교문학적 상상의 날개는 윤회·환생은 물론 사후 세계까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장영우|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와 문예창작학과 교수, 『너머』 발행인, 『불교문예』 편집주간, 동국대 문화학술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이태준소설연구』, 『중용의 글쓰기』, 『소설의 운명, 소설의 미래』, 『연기의 시학』 등이 있다. 동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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