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소낙비가 내릴 때 여름 경주 주사암으로 가자|기도하기 좋은 절

인생에 소낙비가 내릴 때 

여름 주사암으로 가자 

경상북도 경주시 오봉산 주사암



여름 소낙비가 인생에 내린다면?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그치는 소낙비를 두고 사람마다 반응은 다를 것이다. ‘잠깐 오는 비인데 맞을 만하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잠깐이니 처마를 찾아 몸을 피해야지’, ‘탈모가 올 수도 있으니 한 방울도 맞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인생에 소낙비가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25년 여름 날씨는 우리나라 여름 사상 최고의 폭염이라는 걸 보니, 지구 인생에도 생소한 고난일 것이다. 그렇게 치면 이런 때 내리는 소낙비는 불청객이 아니라, 뜨거운 대기와 땅을 일시에 식혀주는 단비가 아닐까. 

인생에 소낙비 또한 비가 오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느냐에 따라 ‘단비’일 수도 있고, 피해야 할 ‘고난’의 순간일 수 있다. 

만약 어딘가에서 인생의 소낙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고 싶다면, 경주 주사암을 추천한다. 마음의 폭염도 잠재워주는 천년 고찰인 데다, 인연이 닿는다면 녹음 짙은 오봉산 ‘편백숲내음길’에서 진짜 소낙비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없는 긴 시간도 하나의 생각에서 비롯되니(無量遠劫 卽一念) 

내 생각이 곧 끝없는 긴 시간이구나(一念卽是 無量劫) 

9세, 10세, 세월도 서로 함께 어울리니(九世十世 互相卽) 

삼라만상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각자의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仍不雜亂 隔別成) 

- 의상대사의 「법성게」 중에서 


경주 오봉산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던 방어선이었다. 오봉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 군사들이 여근곡에 숨어 있다가 격퇴된 곳이자, 신라의 화랑 득오가 공을 세우고 전사한 친구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지어 부른 『삼국유사』 ‘모죽지랑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미 천 년 전, 인생에 거대한 소낙비 맞은 이들의 이야기가 쌓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기도하기 좋은 절로 아는 이들 사이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유명한 ‘주사암’으로 향하는 길은 푯말을 따라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53 선지식의 돌탑’, ‘번뇌가 사라지는 길’, ‘편백나무 숲길’, ‘오봉산 정상’, 김유신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쓰였다는 ‘마당바위’까지… 주사암 가는 길은 이미 온통 수많은 이들의 기도와 염원이 겹겹이 느껴진다. 

산을 오르다 보면, 680m 남짓 높이에 투구 모양의 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바위 앞에 작은 대웅전과 영산전이 벼랑 끝에 붙은 듯이 서 있는 천년 고찰, 주사암을 만난다. 거대한 이끼 바위 사이로 일주문을 대신하는 나무 두 그루가 반기는 작은 암자다. 


 


주사암에는 기도가 영험하게 잘된다는 주사굴이 있는데, 그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의 한 노승이 이곳에서 신중삼매에 들었는데, 귀신들이 노승에게 잘 보이려 궁녀들을 훔쳐서 새벽에 데리고 왔다가 저녁에 궁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이 궁녀에게 또 노승에게 끌려가거든 ‘주사(朱沙, 짙은 붉은빛의 모래)’를 가져가 표시하라고 명령했다. 궁녀가 임금의 말대로 주사병을 던져 바위에 표시하자, 다음 날 군사들이 노승이 있는 동굴을 에워쌌다. 그 순간 노승이 주문을 외우니 순식간에 신의 군사들 수만 명이 나타나 노승을 보호했다. 임금은 부처의 현시를 깨닫고 국사로 모시며, 노승이 있던 바위굴 옆에 절을 지어 주사암(朱砂庵)이라고 이름 지었다. 

기도를 위해 주사암에 올랐다면, 다른 사찰과 달리 주사암 대웅전에 계신 다섯 분의 부처님을 만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영산전의 돌로 만들어진 삼존불(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2호)을 뵙고, 16나한상과 신중탱화를 만나는 것도 남다른 경험이다. 


 


주사암 어느 곳에서든 선계를 경험하시길 기원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오감 체험이 시작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흡이 깊어지고, 명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여름 소낙비라도 내린다면, 주사암은 신선의 세계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떨어지던 직사광선으로 뜨겁게 달궈진 바위와 흙길이 시원한 빗줄기에 식으면서, 대지의 내음을 머금고 수증기로 올라와 잣나무, 편백나무, 소나무들의 코끝을 간질인다. 나무들이 시원한 빗줄기에 바싹 말랐던 비늘을 털면, 숲길 한가득 피톤치드 향이 퍼져나간다. 쏴~ 선선해진 바람 끝에 소낙비가 그치면 파란 하늘이 맑게 갠다. 

그렇다. 소낙비가 그치면, 오봉산 온갖 새들이 노래하고, 불어난 계곡이 코러스를 넣고, 녹음은 맑은 공기를 서라운드로 쏟아내며 더욱 색이 짙어진다. 또 다른 행복이 온다.   


● 오봉산 주사암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천촌리 1195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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