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정신
치유로서의 문학
남지심 소설가

불교문학은 불사(佛事)…
불사의 기능 중엔 치유도 포함되어 있어
Bruce W. Park
“선생님의 『법화경』 사경 회향을 크게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의 문학 불사는 현대 한국 불교의 어느 불사보다도 웅대하고 성공적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 열반하셨을 때 다비식에 참여했는데 그때 선생님을 뵈온 적이 있습니다. 잠시였지만 존경했던 선생님을 뵙고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작품들을 읽고 저의 승려 생활에 큰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속인이 되어 뉴욕에 살지만 늘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내가 이 난에 그 글을 올린 것은, 문학을 불사와 연결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쓴 작품을 현대 한국 불교의 어느 불사보다도 웅대하고 성공적이었다고 평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논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가 그런 시선으로 나를 지켜봐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불교문학만을 고집하며 45년간 글을 써온 내 삶을 보상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불교문학은 불사(佛事)다. 그 불사의 기능 중엔 치유도 포함되어 있다. 치유의 사전적 의미는 치료를 받고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수없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고통을 불교문학이 치유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불교문학은 무엇인가? 불교문학의 정의부터 내리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탐(貪) 진(瞋) 치(癡) 삼독심(三毒心)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을 중생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중생이 모여 사는 세상을 중생계로 인식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중생계에서 중생으로 사는 한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중생계에서 중생으로 윤회하며 반복해 사는 한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아는 거, 그래서 그 일에 허무를 느끼고 어떻게 하든 중생계에서 벗어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는 거, 그러다 마침내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거, 진리의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기는 일에 자신의 전 생명을 바치는 거, 이 과정이 중생에서 구도자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이르기 위해선 강렬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 계기는 성인(聖人)과의 만남이다. 성인과의 만남을 통해 그분이 설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그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기 위해 전 생명을 거는 거, 그게 구도자다.
이 세상엔 성인으로 칭송되는 분들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분들이 설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도 수없이 많다. 여기서 성인과 종교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나는 부처님을 만났고, 그분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경전을 만났고,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도반을 만났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 행복에 추호의 회의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불교 신자로 오늘을 살고 있다. 다른 종교를 신봉하고 그렇게 사는 분들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불교는 팔만사천 경을 보유하고 있다. 이 경들은 삼악도에서 부처의 세계까지 이르는 전 과정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모든 생명은 본인이 인식하든, 못하든 이 길 어느 지점에 안착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중에서 구도자는 이 길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 길을 알기는 참으로 어려움으로 성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게 종교와의 만남이다.
불교의 『화엄경』 안에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이란 독립된 한 품이 있다. 입법계품의 주인공은 선재 동자란 구도자고 선재 동자를 통해 구도자가 가르침을 받는 53명의 선지식이 설명된다. 여기서 동자란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청년 구도자로 보는 게 합당할 것 같다.
지면이 짧아 선재 동자의 구도 행각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 아쉽지만, 선재 동자가 53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구도를 완성했다는 것은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를 완성했다는 말과도 같다. 중생 단계에서 발을 빼 구도의 세계로 들어선 선재 동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굳게 믿으면서 신심을 심화시켜나가다 마침내 현자의 자리를 거쳐 성인의 자리로 옮겨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구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선재 동자의 행로가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전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삼악도에서 시작해 중생의 단계, 구도의 단계, 깨침의 단계, 보살로서의 완성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부처의 집에 들어간, 선재 동자가 걸어간 길은 그 거리가 대체 얼마나 될까? 그 폭은?
그건 아마도 우주의 전체, 현상계를 펼쳐놓은 것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거리와 공간이 우리의 가슴속 마음 안에 들어와 있다니!
불교사상을 문학에 담는 게 불교문학…
불교문학은 생명의 실상을 밝혀주는 지혜의 거울
문학은 마음이 펼치는 세계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아득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량없이 많은 작가가 문학이라는 그릇 안에 작품을 쏟아놓고 있다. 작가들이 쏟아낸 작품들은 작가 개인이 인지한 마음의 세계다. 그 작가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세상을 보고, 본 세상을 작품으로 가공해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 세상에 내놓은 게 시고, 소설이고, 수필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현재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다. 그가 서 있는 자리가 곧 인지의 세계, 이야기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상에 나온 거의 모든 문학작품은 선과 악, 슬픔과 허무, 제도의 모순과 폭력,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숱한 전쟁, 사랑, 욕망, 증오, 갈등… 현실 세계에서 사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심도 있게 바라보고 작품으로 구성해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는다. 그때 작가 몫은 고발이다. 그리고 독자도 작가도 그린 작품세계를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 현실 세계로 인식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묘한 발견을 하게 된다. 선과 악일 때 선의 개념은 어떻게 있게 되었고 악의 개념은 어떻게 있게 되었을까? 인간의 심성이 욕망, 갈등, 무지라면 그 반대 개념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인식하게 되었을까? 제도의 모순과 폭력이라고 할 때 제도가 모순되었다는 거, 그래서 그 모순된 제도로 광범위하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거, 그 개념을 어떻게 알고 인지하게 되었을까? 그건 우리 안에 그 반대 개념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반대 개념의 인지가 내가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구도자가 걸어가는 전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몸담은 이 현실 세계가 세상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안주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세계를 그리고 모순된 개념을 고발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중생계로 보고 그 밖에 이러이러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무한대로 펼쳐진 세계를 작품 안에 담는 것이 불교문학을 하는 작가의 몫이다.
그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마음, 근본 생명이 우주의 근원에서 파생된 진여(眞如)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지하고 설명한 게 불교고, 그 불교사상을 문학에 담는 게 불교문학이다.
그러므로 불교문학은 생명의 실상을 밝혀주는 지혜의 거울이고, 독자들은 그 지혜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치유해간다. 이것이 불교문학이 가지고 있는 치유의 기능이다.
남지심|강릉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장편 「솔바람 물결소리」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자비와 연민의 시선으로 모든 등장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글을 써오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우담바라』(전 4권), 『연꽃을 피운 돌』, 『한암』, 『청화 큰스님』(전 2권), 『욕심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솔바람물결소리』(캐나다 영역 출판), 『인간은 죽지 않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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