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보 사찰 송광사와 혜린 선사|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승보 사찰 송광사와
혜린 선사


800년 지난 지금도 썩어 넘어지지 않고
초연히 보조국사의 환생 기다리는 송광사 고향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 선사가 창건해 길상사(吉祥寺)라 이름하고, 산명을 송광산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 대사가 절을 크게 중수하고자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입적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고려 말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 도량으로 발전했다. 보조국사는 9년 동안의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해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했다. 그리고 사찰명을 수선사로 바꾸고, 산 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꿨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개명해 조계산 송광사로 명명했다. 송광사에는 고향수와 쌍향수라는 나무가 있는데, 모두가 보조국사와 연관된 일화가 전해온다. 하루는 보조국사가 경내에 나무를 심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이 나무도 죽을 것이요, 이 나무에 푸른 잎이 피어나면 나 또한 환생할 것이니라”라고 했다. 이 나무는 과연 보조국사가 열반에 들자 시들시들 말라 죽어 800년이 지난 지금도 썩어 넘어지지 않고 초연히 서서 보조국사가 환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향수라고 불리는 나무를 일컬음이다. 이후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무학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 시대를 열게 되었다.

쌍향수
고향수

전라도 남쪽 땅 송광산, 불보 모시고 불법 전할 성지…
16명의 국사 배출하고 선풍 진작시킨 조계총림 송광사
혜린 선사와 관련된 감동적인 설화는 이러하다. 제자들과 함께 만행 길에 오른 혜린 선사는 험한 산중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게 되었다. “스님,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냐?” “나라 안에 번지고 있는 괴질이 이 산중까지 옮겨졌는지 일행 중 두 스님의 몸이 불덩이 같사옵니다.”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질병임을 느낀 혜린 선사는 엄숙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서원한 출가 사문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무릇 출가 사문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극기력이 있어야 하거늘 이만한 병고쯤 감당치 못하고서야 어찌 훗날 중생을 제도하겠느냐. 오늘부터 병마를 물리치기 위해 정진에 들 것이니 전원이 한마음으로 기도토록 해라. 필시 부처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니라.”

기도로써 병마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 혜린 선사는 적당한 기도처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아니 이럴 수가….” 스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가까운 곳에 연잎이 무성한 연못이 있는가 하면 못 가운데 문수보살 석상이 우뚝 서 계시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뜻밖의 발견에 스님은 기뻤다.

“문수보살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구나.” 문수보살을 향해 정좌한 일행은 기도에 들어갔다. 7일 기도를 마치던 날 밤.

“이제 모든 시련이 다 끝났으니 안심해라. 그리고 이 길로 새 절터를 찾아 절을 세우고 중생 구제의 서원을 실천토록 해라.” 비몽사몽 간에 부처님을 친견한 혜린 선사는 감격 또 감격해 절을 하다 눈을 떠보니 부처님은 간 곳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 혜린 선사는 또 놀랐다.

“스님! 저희 모두 질병이 완쾌되었습니다. 스님의 기도가 극진해 부처님의 영험이 있으셨나 봅니다.” 다 죽어가던 제자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환호하는 광경을 본 혜린 선사는 다시 눈을 감고 앞에 의연히 서 계신 문수보살님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저희를 사경에서 구해주신 문수보살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보살님의 거룩하신 자비심으로 저희의 앞길을 인도해주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혜린 선사는 마치 꿈을 꾸는 듯 어안이 벙벙했다. 언제 오셨는지 노스님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스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선사는 정중히 합장배례한 뒤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지요?”

“소승은 석가세존께서 스님에게 전하라는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노스님은 붉은 가사 한 벌과 향 내음 그윽한 발우, 그리고 세존 진골의 일부분인 불사리를 건네주었다. 혜린 선사는 감격했다.

“이런 불보를 감히 소승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양 말고 수지하십시오. 그리고 소승이 전하는 말을 꼭 명심해 실천토록 하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노승을 통해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혜린 선사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삼배를 올렸다. 절을 마치고 보니 노스님은 간 곳이 없었다. 혜린 선사 일행은 전라도로 발길을 옮겼다. 여러 날이 지나 지금의 승주군 송광면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일행은 백발이 성성한 촌로를 만났다. 노인은 반색을 하며 정중하게 합장배례를 한 후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일로 이 마을에 오셨는지요?” “예, 송광산이 영산이라기에 절을 세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장차 이 산에서 18공이 출현, 불법을 널리 홍포할 것이라 해 18공을 의미하는 ‘송’ 자에 불법을 널리 편다는 ‘광’ 자를 더해 송광산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 산에서 성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때였다. 송광산 기슭에 오색 무지개 같은 영롱한 서기가 피어올랐다. “오! 저기로구나.” 맑은 계곡을 따라 서기가 피어오른 곳으로 향하던 혜린 선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석장을 꽂았다. 그날부터 절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절이 완성되어 진골 불사리를 모시던 날 밤이었다. 절 안에서 교룡이 나는 듯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선사는 절 이름을 길상사라 칭하니 이 절이 바로 16명의 국사를 배출하고 선풍을 진작시킨 조계총림 송광사다.

송광사의 문화유산으로 전해오는 비사리구시에 얽힌 설화 등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밥통 쓰임새 ‘비사리구시’
비사리구시는 천왕문 입구에 세워진 보트 모양의 나무통을 말한다. 송광사 참배객들에게 공양을 주기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담아놓는 일종의 밥통이라고 한다. 18세기 초 전북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수 아름드리 되는 싸리나무가 있었다. 하루는 벼락을 맞아 쓰러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산에서 내리고자 밧줄을 매어 당겼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나무를 옮겨 순천 송광사 대들보를 세우자 어-허 어-허!” 그랬더니 꼼짝도 하지 않던 나무가 움직여 송광사로 이끌 수 있었다. 하나 지금처럼 기중기도 없고 트럭도 없는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몇 달을 끌고 가야 남원에서 송광사까지 옮겨지겠다며 근심 걱정이 컸다. 이를 알게 된 고을 원님이 이르기를, “나무 속을 좀 파내면 가벼워서 운반하기가 쉬울 것이니라”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비사리구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고__백원기|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2025년 별세.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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