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공부

내가 살고,
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내가 하는 공부가 아니다
명상을 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가 명상한다’는 느낌을 깔고 명상에 임한다. 몸을 관찰하거나, 보디 스캔 명상을 할 때도 나의 눈과 코와 어깨와 가슴과 손과 발을 천천히 관찰하는데, 이때 나도 모르게 깊은 곳에 ‘나’라는 관념이 스며 있다. 내가 내 몸을 관찰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호흡을 관찰할 때도 내가 나의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 있고, 참선을 할 때에도 내가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하고 있다는 어떤 느낌을 저 깊은 곳에 깔고 있다.

그것이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말나식과 같은, 자아집착식이며, 나라는 밑바탕의 의식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법한 수행자의 수행 같지만, 거기에는 ‘나’가 있어서, 아상과 에고를 강화시킬 뿐이다.

명상이나 참선을 할 때 미세하게 일어나는 ‘나’라는 생각을 잘 알아차리고, 따라가지 않아 보라. 명상 도중에 나도 모르게 끼어드는 ‘나’라는 의식을 관찰해보라. 내가 사람이라는, 개인이라는 느낌조차 없도록 하라. 내가 앉아 있다는 느낌도 하나의 아상일 뿐이다. 사람인 것 같은, 내가 수행하는 것 같은, 수행해서 깨달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나’라는 개인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깊은 명상에 들면, 이것이 사람인지, 나인지, 몸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는 느낌조차도 없다. 소리가 들리면 그냥 들릴 뿐이지, 여기 있는 내가 저 바깥에 있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내가 혹은 내 귀가 저 바깥에 있는 특정한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나’라는 상이고, 세상이라는 상이다.

그런 상을 내려놓고, 아니 내려놓을 것도 없이, 그저 그냥 이대로 있으면, 이것이 나라는 생각도 없고, 저것이 바깥의 새소리라는 생각도 없다. 그냥 어떤 소리의 파동 하나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어떤 이미지, 모양, 분별상(分別相)들이 생겼다가 흩어질 뿐이다.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그것이 누가 들었는지 하는 것도 없다. 몸에서 느끼는 감각도 그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고, 소리들도 그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고, 모든 것들이 그저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지, 거기에 해석이 붙지 않는다.

나와 세계란 곧 허망한 분별의 이미지들이 사진 한 컷처럼 이미지로 저장되고 쌓여 모인 분별상의 생멸가합일 뿐이다. 나도 세계도 전부 ‘분별망상’일 뿐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나’는 사실 ‘나에 대한 이미지’의 쌓임일 뿐이다. 지난 삶에서 중요하다고 분별한 순간들이 사진 찍히듯 아뢰야식 속에 쌓여, 그것을 ‘나’로 붙잡았을 뿐이다. 그 모든 과거는 내가 아니다. 그 과거가 떠오를 때는 분명 지금 눈앞에서 경험되지 않는가. 모든 과거는 사실 지금 올라오는 분별일 뿐이다. 삶에서 쌓아두고 ‘나’로 삼았던 오온(五蘊)의 경험이 전부 분별일 뿐, 거기에는 ‘나’가 없다.

진실한 것은 나와 세계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의 다양한 모양과는 상관없이 그 모든 상을 비추는 거울 같은 알아차림, 즉 하나의 순수한 있음, 의식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말뿐이어서, 이렇게 알고 이해했다면 그것은 또 아니다.

거짓되고 허망한 분별의식과 이미지를 그저 단순히 따라가지만 않는다면, 바로 지금 여기 눈앞에 무엇이 있는가? 생각과 분별이 없을 때, 그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럼에도, 보이고 들리고 느끼고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이 살아 있는 의식, 마음, 알아차리는 이 앎, 거울의식, 다양한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본연의 것 하나가 있고 없음을 너머 성성하게 깨어 있다. 살아 있다. 아니 그냥 있다. 늘 여여하게 있는 이것. 이것만이 진실하지 않은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나도 아니고 세계도 아니지만, 나와 세계 전부가 이것이다. 이것 하나뿐! 분별만 없다면, 오직 있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불이법.

저절로 되고 있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이 몸이 나라면, 내가 이 몸의 주인이 되어, 이 몸을 주관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몸은 저절로 운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키는 내가 크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고, 잠자려고 애쓰지 않아도 잘 때가 되면 저절로 졸린다. 먹어야 될 때 저절로 배가 고프고, 배가 부르면 저절로 화장실을 찾아간다.

들숨과 날숨을 한 번이라도 놓치면 죽음에 이르지만, 한평생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이, 호흡은 저절로 들어오고 나간다. 내가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숨이 쉬어지고 있다.

내가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삶은 살아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키도 저절로 커지고, 배도 저절로 고파오고, 잠도 저절로 자고, 생명의 핵심은 ‘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나’, ‘내 몸’, ‘내 생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 스스로 나를 통제하려고 애쓴다. 정말 내가 하는 것이 맞을까? 내가 내 몸을 1cm라도 크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맞을까? 그렇다면 왜 부자가 되거나, 키를 크게 하거나, 우울증을 멈추게 하고, 폭주하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가?

정말 내가 나를, 삶을 통제할 수 있을까? 내가 삶을 사는 것일까? 삶은 통제할 수 없고, 그저 삶은 살아지는 것은 아닐까? ‘나’가 있어야만 삶이 유지되는 걸까? ‘나’가 빠져도 삶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살아진다. 이것이 진짜 살림살이요 생명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을 때,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늘 살아 있는 삶 자체가 활활발발하게 깨어 있다. 살아 있다. 무엇이라 할 수 없고, 모양도 없고, 위치도 모르지만, 늘 눈앞에서 살아 있는 이것! 이것이 진정한 나의 본래면목이다.


법상 스님|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6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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