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에서 보는 식물에 대한 인식|식물도 감정이 있지 않을까?

대승불교에서 보는
식물에 대한 인식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식물은 업의 산물이 아니므로 윤회하는 중생에서 제외된다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중생(衆生) 또는 유정(有情)이라고 부른다. 윤회하면서 여러 생을 살기에 ‘무리 중(衆)’을 써서 ‘중생’이라고 부르고, 통각 등 감정을 느끼기에 정(情)이 있다는 뜻에서 ‘유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가 다 윤회하는 중생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식물은 분명 생명체이지만, 윤회하는 중생에서 제외되고, 유정으로서의 감정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생명체인 식물이 왜 윤회하는 중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식물은 정말 윤회하지 않을까? 식물은 과연 감각 내지 감정이 없을까? 식물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과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말하는 윤회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불교는 생명체가 현상세계 속 일원으로 태어나고 죽는 생사의 반복인 윤회를 인과법칙 내지 업보의 원리로 설명한다. 중생이 현상세계에서 업(業)을 지으면, 그 업이 남긴 업력을 따라 그 보(報)로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때 업보는 선업낙과(善業樂果), 악업고과(惡業苦果)의 방식으로 성립한다. 즉 현생에서 선업을 많이 지으면, 다음 생은 즐거운 낙과를 느끼기에 최적화된 근(根, 인식기관)을 갖고 태어나며, 그가 머무르는 곳이 바로 천계나 인간계이다. 또는 현생에서 악업을 많이 지으면, 다음 생은 괴로운 고과를 느끼기에 최적화된 근을 갖고 태어나며, 그가 머무르는 세계가 곧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 등 3악도이다. 여기에 수라계를 더한 6도 윤회의 세계 중에 식물계는 없다.

식물이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물이 업보의 원리를 따라 생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업보의 원리를 따라 생겨난 존재는 계속 그 원리에 따라 또다시 새로운 업을 지으며 살아간다. 반면 식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활동하지만, 식물의 활동은 업이 아니다. 식물이 그 자체 업의 산물도 아니고 또 스스로 업을 짓지도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식물에게는 업을 성립시키는 조건인 탐진치(貪瞋癡)의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업은 탐진치의 번뇌에 물든 행위이고, 그런 번뇌적 행위가 업력을 남겨 윤회를 성립시키는데, 식물에게는 탐진치의 번뇌가 없다. 식물은 탐진치가 없기에 업을 짓지 않으며 업력을 따라 다시 태어나는 존재, 즉 업의 산물이 아니다. 그래서 식물은 윤회하는 중생에서 제외된다.

식물이 유정이 아니라는 것은 망정이 없다는 것이지
감각 내지 인식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업을 따라 윤회하는 중생이 아니기에 식물은 또한 정이 있는 유정도 아니다. 그러나 유정이 아니라고 해서 식물이 무감각한 무생물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중생을 유정(有情)이라고 부를 때의 ‘정(情)’은 탐진치의 업으로 인한 감정, 즉 업의 보(報)로서 느껴지는 고수나 낙수 등의 느낌, 한마디로 번뇌가 묻어 있는 허망한 감정인 망정(妄情)을 말한다. 따라서 식물이 유정이 아니라는 것은 망정이 없다는 것이지, 일체의 감각 내지 인식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식물도 주변 세계를 알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를 보는 인간의 시각기관인 눈의 원형을 식물의 감광세포에서 찾는다. 식물도 빛을 보고 알기에 빛을 향해 성장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식물이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는 적지 않다. 『식물은 알고 있다: 보고 냄새 맡고 기억하는 식물의 감각 세계』라는 책도 그중의 하나이다.

나는 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집 마당에서도 식물이 보여주는 감각과 기억 능력을 실제로 경험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키도 많이 크고 자태도 꽤 아름답다. 그중 30도쯤 비스듬히 누운 자세여서 한층 더 멋이 있는 것이 있는데, 혹시나 바람에 쓰러질까 걱정되어 쇠파이프로 지지대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인공적 쇠파이프가 눈에 띄지 않게끔 그 아래에 덩굴로 감고 올라가는 인동초를 심었다. 인동초는 쇠를 감고 올라가면서 쇠파이프를 가려주어서 좋았지만, 지지대 끝까지 가서는 소나무까지 감고 올라가려 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인동초가 소나무를 건드리지는 못하도록, 지지대 끝에서 더 올라가려고 하는 인동초 가지들을 아쉽지만 무자비하게 다 싹둑 잘라버렸다. 그리고 몇 주 후 다시 자라서 소나무로 올라가려고 하는 가지들을 또 잘랐다. 매번 자라면 계속 자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 두 번의 자름 이후에는 인동초가 소나무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허공으로 뻗어 나가 아래로 방향을 튼 것이다. 소나무 쪽으로 뻗어가면 가지가 잘린다는 사실을 인동초는 두 번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성장 방향을 바꾼 것이다. 가을을 지나 성장이 멈추기까지 인동초는 그 점을 잊지 않았고, 우리는 더 이상 인동초의 가지를 자를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경험 이후 나는 식물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사물을 개념적 분별 작용을 통해 인식하지만, 어쩌면 식물은 그런 분별 작용 없이 세계에 대해 우리의 의식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소통하며 알지도 모른다. 인식 능력이 반드시 인간이나 축생의 경우처럼 눈이나 코나 귀 또는 뇌와 같은 감각 내지 사유 기관(부진근)을 가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능엄경』의 말대로 방에서 창을 통해 밖을 볼 때 실제로 보는 자가 창이 아니고 사람이듯이, 사람이 눈을 통해 밖을 볼 때 실제로 보는 자는 눈이 아니고 무형의 마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나 축생에게 있는 시각이나 청각 기관이 식물에게 없다고 해서 식물이 보거나 듣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뇌 측두엽의 해마에서 일어난다고 하지만, 식물은 그런 것 없이도 분명 보고 들은 것을 더 잘 기억할지도 모른다.

결국 식물이 윤회하는 중생이 아닌 것은 업과 윤회를 성립시키는 탐진치의 번뇌가 없기 때문이고, 식물이 정이 있는 유정이 아닌 것은 식물이 세계와 소통하되 탐진치의 번뇌에 물든 허망한 망정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식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살아 있는 생명체이되 업력을 따라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세계와 소통하되 망정을 일으키지 않는 존재, 이런 식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축생이나 인간처럼 업으로 인한 업력에 따라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면, 식물은 과연 무슨 힘에 의해 이 땅에 온 것일까?

생명체이되 업력을 따라 윤회하는 중생이 아닌
식물은 원력을 따라 현현한 보살이 아닐까?
이 땅에 생명체를 오게 할 수 있는 힘은 업력(業力) 아니면 원력(願力)이다. 중생은 탐진치의 업으로 인한 업력을 따라 윤회해 이 땅으로 돌아온다. 반면 수행자는 탐진치의 번뇌를 모두 멸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업력이 다하면 윤회하지 않고 열반에 들 수 있다. 즉 생사를 떠나 열반에 든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대승이 지향하는 것은 생사를 떠나 열반에 드는 것, 중생을 떠나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승의 지향점은 불이(不二)의 원리, 자타분별 너머의 자비의 마음을 따라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해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고통받는 중생을 차마 두고 떠나지 못하고, 중생 구제의 원을 세우며 그 원력(願力)을 따라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원력을 따라 이 땅에 오는 자가 바로 보살(菩薩)이다. 생명체이되 업력을 따라 윤회하는 중생이 아닌 식물은 결국 원력을 따라 현현한 보살이 아닐까?

식물의 행태는 보살과 흡사하다. 이 땅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식물은 고통받으며 윤회하는 중생을 먹이고 살린다. 윤회하는 중생인 축생과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은 식물로부터 얻어진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해 우리로 하여금 숨 쉴 수 있는 깨끗한 공기를 만들어주고, 우리에게 살아갈 에너지원이 되는 먹거리를 제공한다. 무기물의 자연물이 우리 몸의 무기물과 하나로 통할 수 있는 것도 식물의 매개를 통해서이다. 우리는 쇠 조각이나 돌가루를 그냥 먹지 못한다. 식물을 먹음으로써 내 몸과 세계가 같은 요소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식물은 우리를 먹여 살리면서, 우리가 다른 축생을 잡아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식물이 중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내어주는 것이 재보시에 해당한다면, 식물이 제공하는 또 다른 귀중한 것은 법보시다. 식물은 우리에게 생멸의 무상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백 일을 피는 백일홍도 있지만, 피어난 지 며칠 안 되어 허망하게 지는 벚꽃도 있다. 피어난 꽃잎이 시들고, 울창했던 나뭇잎이 조락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식물은 또 우리에게 무상한 것들의 끝없는 반복인 윤회도 보여준다.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다시 새 생명이 싹튼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식불교가 업보의 윤회를 성립시키는 ‘업력(業力)’을 식물의 씨앗을 뜻하는 ‘종자(種子)’로 설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식물이 불법(佛法)을 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땅속에 있던 종자가 새봄에 발아해 싹으로 피어나는 것을 통해 식물은 또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생명력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식이 종자를 함장하는 식(識)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논하는 것도 식물로부터 얻은 통찰일 수 있다.

그리고 또 식물은 무상과 윤회 너머의 진리, 영원한 진제(眞諦)도 보여준다. 춘하추동의 찬란한 색의 변화 아래 뿌리는 언제나 하나의 색, 지상에서 변화하는 모든 색을 더한 색, 검은색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드러나는 모든 색을 합하면 검은색이지만, 그러한 색을 낳는 모든 빛을 합하면 흰빛, 밝음이다. 식물의 뿌리를 살아 있게 하는 힘, 보살의 원력으로 되돌아온 식물의 생명은 바로 그 빛, 밝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곧 우리의 본래 마음인 진여 일심의 본각(本覺)의 밝음, 명(明)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식물은 재보시로서 중생을 먹여 살리고, 법보시로서 중생에게 삶의 무상성과 윤회 및 진여 일심을 깨닫게 해준다. 중생을 위해 아낌없이 보시하되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베풀고 있는 식물, 어찌 보살의 현현이 아니겠는가.


한자경|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계명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의 무아론』, 『대승기신론 강해』, 『마음은 이미 마음을 알고 있다: 공적영지』,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일체유심조』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