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에서 보는
식물에 대한 인식
이자랑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한국불교인문학과 교수

경전에 따라 불교의 시각 차이 있지만
초기 내지 부파불교에서는 식물을 생명체로 보지 않는 듯
사계절을 거쳐 변화해가는 식물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인간이나 동물과는 달라도 그들 역시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느껴진다. 겨우내 죽은 듯 메말라 있던 나무와 땅에서 연둣빛 새싹이 머리를 내밀 때 느끼는 초봄의 감동을 어찌 잊을까. 그뿐인가. 식물은 때로는 식량으로 때로는 건축 재료 등으로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최고의 이타행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식물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불살생을 강조하는 불교도는 식물의 이런 이타행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아침마다 식탁에 오르는 샐러드도 수목의 채벌(採伐)로 얻게 된 온갖 목재도 식물이나 수목의 살생을 전제로 얻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식물을 어떤 존재로 바라볼까? 식물을 바라보는 불교의 시각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본고의 주제인 ‘초기 불교’에 초점을 두고 말할 때도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초기 경전에서 ‘식물도 유정이다’ 혹은 ‘식물은 유정이 아니다’ 이렇게 명언하는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초기 내지 부파불교에서는 식물을 생명체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이하, 그 이유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오도 내지 육도에 식물은 포함되지 않아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오도(五道) 내지 육도(六道)에 식물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유정, 즉 중생이 윤회하는 방식을 다섯 내지 여섯 가지로 제시한다. 오도는 지옥·아귀·축생·인·천을, 육도는 이에 아수라를 포함한다. 이 중 식물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축생의 원어인 ‘띠랏차나가타(tiracchāna-gata)’는 수평으로 걷는 생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물을 비롯해 새, 물고기, 곤충, 벌레 등이 다 포함되지만, 자력으로 이동 불가능한 식물은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초기 경전에서는 중생이 태어나는 방식을 사생(四生)이라 해,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의 넷으로 분류한다. 태생이란 모태에서 태어나는 인간이나 동물 등을, 난생이란 알에서 태어나는 새나 파충류 등을, 습생이란 장구벌레나 습한 곳에서 생겨나는 작은 벌레 등을, 화생은 과거의 자신의 업에 의해 태어난 지옥의 중생이나 천인(天人) 등을 말한다. 사생에도 식물이 들어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율장에서도 살생계의 대상으로 식물은 고려하지 않아
한편 출가자들의 일상생활 규범을 모아놓은 율장의 경우에도 관련 조문을 보면 식물의 생명을 인정하는 용례는 발견하기 어렵다. 먼저 바일제 제61조 ‘탈축생명계(奪畜生命戒)’는 고의로 생물(pāṇa)의 생명을 뺏으면 바일제죄가 된다는 내용이다. 어떤 비구가 까마귀를 싫어해 화살을 쏘아 죽인 것을 계기로 제정되었는데, 여기서 생물이란 축생이라고 설명된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축생에는 식물이 들어가지 않으며, 율장에서도 살생계의 대상으로 식물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바일제 제11조 ‘벌초목계(伐草木戒)’에서는 초목을 채벌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 조문은 얼핏 보면 마치 초목의 생명을 고려해 채벌을 금지하는 듯하지만, 『인연담』을 보면 수목에 사는 수신(樹神)에 대한 배려가 금지의 일차 이유이다. 비구들이 탑묘(塔廟, cetiya)를 수리하기 위해 스스로 나무를 자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기도 했다. 그중 한 나무에 살고 있던 여신이 주처(住處)를 잃게 되자 화가 나 비구를 해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붓다에게 알린다. 이에 붓다는 그 여신에게 다른 나무로 이동할 것을 권유한다. 수목 자체의 생명이 아닌, 여신 등 수목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 고려해 식물을 해치는 행위는 금지해
한편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수목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금지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일을 들은 일반인들이 “어찌하여 사문석자는 나무를 베거나 베게 한단 말인가. 사문석자는 일근(一根, ekinndriya)의 생명(jīva)을 해치는구나”라며 비난한다. 그러자 붓다는 문제의 행위를 한 비구들을 꾸짖으며 “사람들은 나무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한다(jīvasaññnino)”라며 초목을 벌채하는 행위를 하면 바일제죄를 짓게 된다고 규정한다. 즉 일반인들은 수목이 일근의 생명을 갖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이를 고려해 수목을 벌채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으로 볼 때 이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고려한 결정이지, 결코 불교의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인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식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자이나교는 식물을 촉각의 일근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사람들이 식물을 일근의 존재로 본다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율장 곳곳에 나오지만, 항상 동일한 맥락이다. 즉 일반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전제하에 수용되고 있다. 당시의 일반적인 통념에 반해 왜 붓다가 식물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지, 이에 대해서는 식물은 윤회를 발생시키는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중생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숫따니빠따』 629게처럼
식물의 생명 인정하는 듯한 구절 소수지만 초기 경전에서 발견
한편 식물의 생명을 인정하는 듯한 구절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초기 경전에서 발견된다. 앞서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는 전제를 단 것은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숫따니빠따』 629게에서 “움직이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그러한]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폭력을 삼가고, 죽이지 않으며, 죽이게 하지 않는 자를 나는 바라문이라 한다”와 같은 경우이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것에 식물이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식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경전의 성립 순서나 상호 관계 등을 고려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생의 윤회나 태어남의 방식을 규정하는 교리에서 식물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살생의 문제에서도 식물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초기 불교에서 식물은 유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식물을 유정으로 생각하는가와는 별개로
초기 경전에서도 식물의 파괴는 삼가야 할 행위로 여겨
다만 식물을 유정으로 생각하는가 아닌가와는 별개로 초기 경전에서도 식물의 파괴는 삼가야 할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디가 니까야』의 「브라흐마잘라 숫따(Brahmajāla-sutta)」에서는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신심 담긴 보시물로 생활하면서도 여러 종류의 종자(bījagāma)나 여러 종류의 종자에서 생장한 것(bhūtagāma)을 파괴하며 살지만, 사문 고따마는 이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 ‘여러 종류의 종자’란 나무에서 분리되어 생장할 능력을 갖춘 것을, ‘여러 종류의 종자에서 생장한 것’이란 나무에서 분리되지 않고 마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자란 총 5종으로 각각 뿌리(根, mūla)·가지(幹, khandha)·마디(節, phalu)·줄기(枝, agga)·씨앗(種, bīja)을 말한다. 즉 이들 5종의 종자로부터 나와 싹을 틔우고 생장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은 채벌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초기 불교에서 식물을 유정으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용례는 거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싹을 틔우고 생장 능력을 갖춘 종자 내지 식물을 파괴하는 행위 역시 축생을 해치는 행위와 동일한 차원의 악행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설사 ‘식물은 일근을 갖춘 생명이다’라는 일반인의 상식을 받아들인 조치라 해도, 이를 수용해 조문으로 제정한 이상 그것은 불교 수행자에게 있어 악행으로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이 생명을 갖춘 존재인가 아닌가를 떠나, 『숫따니빠따』 「멧따 숫따(Metta-sutta)」의 다음 게송은 식물을 포함한 일체 존재를 대하는 불교인의 이상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어떠한 생물(pāṇabhūta)이건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긴 것이든, 큰 것이든, 중간의 것이든, 짧은 것이든, 극소의 것이든, 거대한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멀리 사는 것이든, 가까이 사는 것이든,
태어난 것이든, 태어날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생물’이라는 범주하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게 될 생명까지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고 서두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하물며 식물은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주는 최고의 이타행자이다. 생명의 유무를 떠나 이처럼 훌륭한 존재를 어찌 소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자랑|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으며, 일본 도쿄(東京)대학교에서 「초기 불교 교단의 연구–승가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이라는 주제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한국불교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나를 일깨우는 계율 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율장의 이념과 한국 불교의 정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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