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의 신나는 마음
- 신명(神明)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현대인의 마음
여태 마음을 다루면서 미안한 것이 있다면 과연 현대인의 시점에서 마음을 다루었느냐는 것이다. 공맹의 ‘착한 마음’이나 노자의 ‘맑은 마음’이나 좋긴 좋다. 누구나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도 현대인의 삶에서 그런 마음을 갖거나 지니기는 쉽지 않다.
누가 착한 마음을 갖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내 앞의 현실은 악의 무리가 판을 치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다.
누가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바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그런 마음을 지니기는 정말 쉽지 않다.
집 안에 들어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 착한 마음이 생기고, 산중에 들어가 개울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맑은 마음이 생기지만, 복잡한 교통 상황 속에서 할 일이 태산인 오늘의 나에게 착한 마음이나 맑은 마음은 사치이고 남의 이야기인 듯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현 가운데 그런대로 현대인 삶에 가깝게 마음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없을까? 있다. 다만 그를 잘 모를 뿐이다. 그가 바로 순자(荀子)다.
‘공자, 맹자’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를 잇고자 한 인물은 맹자만이 아니었다. 맹자와 비슷한 시절의 순자가 그러했다. 아니, 오히려 당시에는 공자의 적통은 순자로 여겨졌다. 공식적으로 그랬다는 말이다. 순자가 여러 학설을 하나로 모으려고 했던 직하학의 총책임자였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흔히 우리가 순자를 아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해 성악설을 내세운 것 때문인데, 사실 중요한 것은 본성 자체의 선악 문제가 아니다. 선과 악이란 사회적인 판단인데 본성이라는 것을 고립적으로 떼어놓고 보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선과 성악이라는 가정은 가능하고, 그런 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한마디로, 성선을 믿으면 학교를, 성악을 믿으면 감옥을 짓는다.
그런데 왜 맹자도 유가이고, 순자도 유가일까? 그것은 공자가 강조한 것이 인(仁)만이 아니라 예(禮)도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은 사랑의 길이요, 너그러운 길이다. 그 길을 맹자가 간다. 반면 공자의 예는 제도(制度)의 길이요, 딱딱한 길이다. 그 길을 순자가 간다.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논어』, 「안연」)고, 안연이 실천 세목을 묻자 이처럼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라. 공자가 말하는 사랑의 길 뒤에는 반드시 예제(禮制)라는 제도가 밑받침된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까닭은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고 남들과 어울리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까닭도 시험을 보면서 더 깊이, 더 또렷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도는 많은 경우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제도는 누가 만들었나? 유가는 그 제도 전반을 예라고 불렀다. 바로 그 예를 요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 성인은 예제를 어떻게, 왜 만든 것일까? 순자는 여기에 대답한다.
문명의 건설
순자에 대한 가장 큰 공격은 이렇다. 성인이 좋은 제도를 만들었다는데, 성인도 사람이라면 성악하기 때문에 좋은 제도를 만들 수 없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본질적인 질문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끼리 모여서 나쁜 제도를 만드는 것도 우리는 늘 보고, 악한 사람끼리 모여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늘 보기 때문이다. 좋은 이웃집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히틀러의 명을 받아 유대인 학살을 벌이는 것도, 깡패끼리도 집단의 유지를 위해 의리라는 도덕적 명분을 내세우는 것도 우리는 마주한다.
오히려 악할수록 선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순자는 제도에 매달린다. 공부를 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순자』의 첫 편이 「권학(勸學)」이며, 그다음이 「수신(修身)」이다. 학문을 권하는 까닭은 예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고, 수신을 해야 하는 것은 그래야 예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자, 어떤 인물인가? 하늘의 뜻을 결코 믿지 않는다. 기도를 아무리 해도 비는 오지 않는다고 믿은 사람이다.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현대인의 의식과 같다. 그런데도 제사는 지내란다. 왜?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라는 형식적 의례이기 때문이다. 조상의 넋은 없어도 좋다. 그럼에도 조상을 기리며 화친하란다.
순자는 도가의 ‘마음 비우기’도 받아들인다. 이른바 ‘허일이정(虛壹而靜)’(「해폐」)으로 ‘비워서 하나로 만들면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별의별 것이 들어온다. 그때 비워야 한다. 비운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러면 고요해질 수 있다.
도가의 허정(虛靜)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무(無)가 아닌 일(一; 壹)의 세계임을 분명히 한다. 그 하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순자는 이렇게 객관적 표준을 전제한다. 그가 ‘하나를 좋아하기’라는 뜻에서 ‘일호(一好)’(「수신」)를 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순자는 이렇게 보편적 원리를 만드는 정신을 ‘신(神)’ 또는 ‘대신(大神)’(「왕제」)이라고 부른다. 그냥 개별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만물에 적용되는 원칙을 생산하는 정신이 바로 ‘큰 정신’이자 ‘신명(神明)’이다. 순자의 어구를 보자.
“하나이지 둘이 아니니 신명과 통하고 천지에 참여한다.”(「유효」)
“신명은 넓고 큼으로써 가장 간략하게 만든다.”(「왕제」)
세상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세상을 하나로 모으는 제도에 의해 우리는 삶을 영위하고 자기를 실현한다. 교육제도, 사회제도, 결혼제도, 의료제도 등등 오늘날의 수많은 법제(法制)가 모두 그러하다.
신명 나게 살자
어른들은 흥이 많은 사람을 ‘신명이 많다’고 표현했다. ‘신명 난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그것은 ‘신난다’는 표현으로 남아 있다.
현대인들은 신명을 찾고자 댄스홀에 가서 춤도 추고, 스포츠센터에 가서 운동도 한다. 일이 정말로 잘되려면 신명 나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다. 고대의 성인은 신명이 나서 문명을 건설했다. 대한민국의 현대화도 신명으로 이루어냈다. 오늘날 흔히 쓰는 ‘일 중독(workaholic)’이란 표현은 너무 부정적이다. 조국과 가정을 위해, 동료와 이웃을 위해 ‘신나는 마음’으로 일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격하한다.
능률에서, 효과에서, 숙련에서 신나는 마음을 이길 방도는 없다. 곳곳에 숨어 있는 생활의 달인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이 밝은 표정의 신나는 마음이다. 신나는 마음으로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돈도 벌어보자. 나의 신명이 천지의 신명과 하나가 될 때까지.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