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윤회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니까야 산책, 초기 불교로 풀어보는 불교

부처님은 

윤회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이중표

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교 하면 떠오르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윤회다. 대부분 부처님께서 ‘중생은 육도(六道)를 윤회한다’라고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윤회에서 벗어나 윤회를 그치는 것이 해탈(解脫)이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해탈의 길을 알려주셨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윤회설과 무아설이 충돌한다. 무아(無我)라면 윤회할 수가 없는데 왜 윤회설이 있고, 윤회한다면 무아라고 할 수가 없는데 왜 무아설이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부처님께서 윤회설과 무아설을 둘 다 가르쳤을까? 부처님의 육성을 담고 있는 경전은 초기 근본 경전인 『아함경』과 『니까야』이다. 이 물음은 『아함경』과 『니까야』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니까야 산책>이라는 이 코너에서, 이 문제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부하는 가운데 접하게 되는 의심을 근본 경전을 통해 풀어보려고 한다.  


『맛지마 니까야』 38. 갈망하는 마음의 소멸 큰 경(Maha-tan.ha-san.khaya-sutta)에 의하면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싸띠(Sa-ti)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윤회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께서는 식(識)이 윤회한다고 가르쳤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부처님께서는 싸띠(Sa-ti) 비구를 불러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어리석은 사람아,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가르쳤다고 그대는 알고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갖가지 비유를 들어서 조건에 의지하여 함께 일어난(緣起한) 식(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조건(緣)이 없으면 식(識)은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리석은 사람아, 그런데 그대는 자신이 잘못 파악한 견해로 우리를 중상하고, 자신을 해치고, 많은 죄를 짓는구나. 어리석은 사람아, 그것은 그대에게 오랜 세월동안 무익한 괴로움이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윤회를 가르쳤다고 하는 것은 불교를 중상하는 큰 죄가 된다는 말씀이다. 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불교를 잘 이해하면 윤회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과거로 돌아가서, ‘우리는 과거세(過去世)에 존재했을까, 존재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그다음에는 무엇이었을까?’라고 하겠는가? (중략)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미래로 앞질러 가서, ‘우리는 미래세(未來世)에 존재하게 될까, 존재하지 않게 될까? 우리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우리는 미래세에 어떻게 될까? 우리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었다가, 그다음에는 무엇이 될까?’라고 하겠는가? (중략)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지내는가? 이 중생(衆生)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지금 이 시간에 자신에 대하여 지금 의혹이 있는가?


이와 같이 윤회한다는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맛지마 니까야』 2. 일체의 번뇌(漏) 경(Sabba-sava-sutta)에서도 확인된다. 


무지한 범부는 다음과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한다오. 

‘나는 진실로 과거세에 존재했을까, 존재하지 않았을까? 진실로 과거세에는 무엇이었을까? 진실로 과거세에는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진실로 과거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존재했을까? 나는 진실로 미래세에 존재하게 될까, 존재하지 않게 될까? 진실로 미래세에는 무엇이 될까? 진실로 미래세에는 어떻게 지내게 될까? 나는 진실로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존재하게 될까?’ 

현실에서는 현세(現世)의 자신을 의심한다오. 

‘나는 진실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진실로 무엇인가? 나는 진실로 (현세에) 어떻게 지낼까? 이 중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될까?’

무지한 범부가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면, 그에게 여섯 가지 사견(邪見)들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긴다오. ‘나의 자아(自我)는 존재한다. 이것은 진실이며 확실하다’라는 견해가 생기거나, ‘나의 자아(自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이며 확실하다’라는 견해가 생기거나, ‘내가 자아(自我)를 가지고 자아(自我)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진실이며 확실하다’라는 견해가 생기거나, ‘내가 자아(自我)를 가지고 비아(非我)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진실이며 확실하다’라는 견해가 생기거나, ‘내가 비아(非我)를 가지고 자아(自我)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진실이며 확실하다’라는 견해가 생긴다오. 혹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에서 선악업(善惡業)의 과보(果報)를 받는 나의 이 자아는 지속적(持續的)이며, 일정(一定)하며, 영속적(永續的)이며, 불변(不變)하는 법(法)이며, 영원히 그대로 머물 것이다’라는 견해가 있을 것이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사견(邪見)에 빠짐, 사견을 붙잡음, 사견의 황무지, 사견의 동요, 사견의 몸부림, 사견의 결박이라고 한다오. 비구들이여, ‘사견의 결박에 묶인 무지한 범부는 생(生), 노사(老死), 근심(憂), 슬픔(悲), 고통, 우울(憂鬱), 불안(不安)이 있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나는 말한다오.

  

이 경에서 부처님은 과거세에 존재하던 내가 현세에 이곳에 와서 살다가 미래세에 어딘가에 가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을 범부들의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라고 말씀하신다. 중생이 윤회한다는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는 범부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의 생각을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이라고 가르쳤을 리가 없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으로부터 ‘자아’가 존재한다는 갖가지 사견(邪見)이 생기며, 이러한 사견(邪見)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사(生死)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윤회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아’가 있어서 윤회한다고 생각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사견(邪見)을 버리도록 가르친 것이다. 


2. 일체의 번뇌(漏) 경(Sabba-sava-sutta)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들이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들로서 성인의 제자가 생각하지 않는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만약에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욕루(欲漏)가 생기고 이미 생긴 욕루(欲漏)가 커지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유루(有漏)가 생기고 이미 생긴 유루(有漏)가 커지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무명루(無明漏)가 생기고 이미 생긴 무명루(無明漏)가 커진다면, 이런 것들은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들로서, 성인의 제자가 생각하지 않는 법들이라오. 

비구들이여, 어떤 것들이 생각해야 하는 법들로서 성인의 제자가 생각하는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만약에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욕루(欲漏)는 생기지 않고 이미 생긴 욕루(欲漏)는 소멸되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유루(有漏)는 생기지 않고 이미 생긴 유루(有漏)는 소멸되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무명루(無明漏)는 생기지 않고 이미 생긴 무명루(無明漏)는 소멸된다면, 이런 것들은 생각해야 하는 법들로서 성인의 제자가 생각하는 법들이라오. 성인의 제자가 생각해서는 안 될 법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생각해야 할 법들에 대하여 생각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번뇌(漏)는 생기지 않고 이미 생긴 번뇌(漏)는 소멸한다오. 

성인의 제자는 ‘이것은 괴로움(苦)이다’라고 이치에 맞는 생각을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쌓임(苦集)이다’라고 이치에 맞는 생각을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苦滅)이다’라고 이치에 맞는 생각을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이다’라고 이치에 맞는 생각을 한다오. 이와 같이 생각하면 그에게 세 가지 결박, 즉 자기 자신이 있다고 보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心) 그리고 계율이나 의례에 대한 집착(戒禁取)이 소멸한다오. 


부처님께서는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면 욕루(欲漏), 유루(有漏), 무명루(無明漏)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해서 생긴다고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라는 생각이 모든 번뇌의 뿌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생사해탈은 윤회에서의 해탈이 아니라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는 사견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는 사견으로부터 생사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이 나타나기 때문에 사견을 버리면 생사 고뇌(苦惱)가 사라진다.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생사(生死) 해탈(解脫)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생각해서는 안 될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경에서는 사성제(四聖諦)를 그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성제(四聖諦)를 고집멸도(苦集滅道)로 단순하게 알고 있지만,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진리를 포괄하는 가장 큰 교리 체계이다. 이것을 28.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 큰 경(Maha-hatthipadopama-sutta)에서는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 속에 들어가듯이, 모든 선법(善法)은 사성제 속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사성제는 고(苦)를 핵심으로 하는 교리 체계다. 사성제의 명칭이 이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라고 알고 있는 사성제는 원래 명칭은 고성제(苦聖諦),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이다. 사성제는 고(苦), 즉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교리 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성제(苦聖諦)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28.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 큰 경(Maha-hatthipadopama-sutta)에서는 고성제(苦聖諦)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자들이여, 고성제(苦聖諦)란 어떤 것인가? 태어남(生)이 괴로움(苦)이고, 늙음(老)이 괴로움이고, 죽음(死)이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불안이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라오. 요컨대 오취온(五取蘊)이 괴로움이라오.


이 경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오취온(五取蘊)으로 귀결된다. 바꾸어 말하면 오취온이 곧 고성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취온이란 어떤 것인가? 오취온은 중생들이 자기 존재로 취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오취온을 자아로 취해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는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취온에 대해 그 실상을 잘 관찰하면 ‘윤회하는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니까야(Nika-ya)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모임’이란 뜻으로, 초기 불교 경전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직계 제자들의 설법들 가운데 경의 길이가 긴 것을 모은 『디가 니까야(長部)』, 경의 길이가 중간인 것들을 모은 『맛지마 니까야(中部)』, 주제별로 경을 모은 『상윳따 니까야(上應部)』, 가르침이 담고 있는 숫자[法數]에 주목해 하나부터 열하나까지의 법수에 따라 경을 모은 『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를 4부 니까야라고 한다. 그 외에 부처님 말씀이나 여러 스님들의 설법이나 일화, 전기, 게송 등은 『쿳다까 니까야(小部)』에 있다.


이중표│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전남대 호남불교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아함의 중도체계』, 『근본불교』,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등이 있으며,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 『불교와 양자역학』등의번역서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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