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열에 찬, 저 높은 봄|책꽂이에서 고른 문장을 읽으며


희열에 찬, 저 높은 봄


문태준|시인


그림|송민선


다시 성큼성큼 거뭇한 오솔길을 걸어서

봄이 폭풍 개인 산을 내려온다

다시 콸콸, 아름다운 그가 다가오는 곳에서는

사랑과 꽃들이 그리고 새들의 노래가 샘솟는다


다시 그가 내 감각을 유혹한다

이 곱게 꽃 피어난 맑음 속에서

내가 그 손님일 뿐인 땅이

내 것인 듯, 아름다운 고향인 듯 보이도록

- 헤르만 헤세의 「봄」


헤르만 헤세는 많은 시를 지었다. 봄에 관한 서정을 노래한 시도 꽤 여럿이다. 몇 편을 보자. “이제 아무것도 더 잠자지 못한다/ 이제 온 땅이 깨었다/ 봄이 부르고 있다”(「이른 봄」) “이제 너 열려/ 광휘와 장식 속에/ 빛 퍼부어져/ 기적처럼 내 앞에 펼쳐져 있구나”(「봄」) “나무 덤불 속에서 바람이 그리고 새들의 휘파람이/ 또 저 높이, 가장 높은 감미로운 푸름 속에서는/ 고요한, 자랑스러운 구름배 한척……”(「봄날」) “어린애마다 알고 있습니다. 봄이 말하는 것을/ 살아라, 자라라, 꽃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내밀라/ 몸을 던지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봄의 말」)

헤세는 봄이“내려온다”라고 썼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성큼 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서. 콸콸 쏟아지며. 이 표현들은 참으로 멋지다. 봄이라는 존재가, 한 몸이 우리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다. 마치 오래 만나지 못한 친척이 내 집을 찾아오듯이. 누군가 올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맞이하지 않는가. 맞아 후하게 대접하지 않는가. 헤세는 봄이 다가오면“사랑”과“꽃들”과“새들”이 맞이한다고 표현했다. “사랑”, “꽃들”, “새들” 의 노래와 희열이 샘물처럼 스스로 솟아 봄을 응접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선에는 ‘관계’를 보는 안목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라는 생각이 반석처럼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봄을 우리 인간이 맞이한다. 비록 우리 인간도 사실은 이 세상으로 온 손님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먼저 왔기에 뒤에 온 봄을 맞이한다. 봄은“곱게 꽃 피어난 맑음”그자 체이다. 봄이 왔으므로 봄과 인간은 서로 사귀고 유혹한다. 그리고 그러한 둘의 사귐은 이 세상이 나의 재산처럼, “아름다운 고향”처럼 여겨지게 한다. 봄은 그처럼 마음 씀씀이와 태도가 너그러워 모든 생명들에게 두루 평온과 유순함을 선물한다.

봄은 바닥이 평평한 신발을 신고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봄은 평상복을 입고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봄은 와서 서민의 집에 사는 게 아닐까 한다. 봄은 와서 정원을 가꾸고, 돌을 씻기고, 나무의 새잎으로 올라가고, 담소하며 골목을 거닐고, 장바구니를 들고, 밥을 짓고, 양념을 치고, 술렁술렁 떠들고, 더럽혀진 옷을 빨고, 환하고 밝은 하늘 아래 이불을 널고, 가계부를 적으며 우리 집에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봄처럼 살아야 한다. 사랑이 생겨나게 해야 한다. 꽃들이 피게 해야 한다. 새들이 악기처럼 노래하게 해야 한다. 모든 생명들에게 환희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영혼을 높은 곳에 있게 해야 한다. 강물, 바람, 흙, 구름, 나무, 새, 곤충, 지평선, 꽃에게 가 서 그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의지가 되어야 한다.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다.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아침은 생각한다』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애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인환상, 김광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