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에 솔바람
그림/글 이호신 화가
하동 축지리 문암송 267×167cm, 2019 |
모쪼록 누리에 솔바람이 여여하기를
이 땅의 소나무를 찾아 산천을 떠돌며 화첩을 편 일이 오래되었다.
그 솔 그늘 속에서는 안식과 함께 경배의 마음이 일었다. 소나무를 통해 지상과 우주의 만남을 헤아리고 기상과 장엄 그리고 나눔의 이치를 알게 했으니.
어린 솔의 희망과 솔숲의 장관도 좋지만 노송(老松)이 품은 하늘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바위와 척박한 대지 위에 내린 생명의 뿌리, 장대한 줄기와 갈라 터진 용비늘 껍질, 사방 가지의 자유로운 형상, 잔가지에 달린 솔잎 바늘은 허공을 찌르며 바람결에 살랑이는 솔방울까지.
구례 난동 당산소나무 58×46cm, 2017 |
그중 지리산에서 만난 소나무는 산천과 마을을 품고 있었다.
남원 와운마을의 ‘천년송’은 지리산의 으뜸 소나무로 알려져 있다. 남북전쟁 당시 마을이 폭격으로 다 불탔는데도 이 소나무는 건재해 오늘에 이른다. 굽이굽이 산 물결을 바라보고 선 천년의 소나무다.
남원 지리산 천년송 268×176cm, 2021 |
하동 축지리의 ‘문암송’은 바위와 한 몸이다. 거대한 소나무가 바위에서 솟아나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 건너 평사리의 두 소나무 ‘부부송’은 너른 들녘에 정다움을 더한다.
구례 지리산둘레길 난동에서 만난 ‘당산 소나무’는 두 소나무 사이에 돌탑을 쌓고 해마다 당산제를 지낸다. 소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인 셈이다.
산청 궁소마을 대왕송 138×171cm, 2008 |
함양의 벽송사 ‘벽송’은 천하의 미인송으로 절 이름을 얻었다. 소나무 아래서 바라보면 원융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절감하게 한다. 한편 송정리의 ‘세진대 소나무’는 마을 주민의 반려다. 거대한 너럭바위에 솟은 우람한 소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모인다. 소위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곳에서 보내니 소나무가 삶의 동반자라 할 만하다.
산청 궁소마을의 ‘대왕송’은 해와 달을 맞고 보내는 높은 언덕에 있다, 황매산 해돋이와 지리산 노을을 품고 세상을 관조하는 기상은 제2의 천년송으로 손색이 없다. 또 천왕봉 길목의 중산리 ‘청송사 소나무’는 거대한 반송으로 마치 청도 운문사의 500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를 연상하게 한다.
한편 단성면 성철공원의 ‘학이재 소나무’는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 강좌를 여는 터전에 있다. 귀촌한 부부와 가족이 일군 공간에서 세 그루의 거송이 치솟아 솔숲을 이루며 삶의 둥지가 되고 있다.
함양 벽송사의 벽송 137×70cm, 2011 |
평생을 소나무 찬미로 살다 가신 박희진 시인은 “소나무는 나의 지기(知己)요, 스승”이라고 했다. 실은 이 땅에서 소나무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이 각박한 환경 속에서는 더욱 소나무의 기상과 덕목이 그립다. 모쪼록 누리에 솔바람이 여여하기를.
이호신|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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