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에너지
구병수
동국대 일산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근간에 화두로 떠오르는 병이 있다. 바로 화병이다. 울화병이라고 해 나라 전체가 화병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심상치 않다. ‘화’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간에 인식되는 화병에서의 ‘화’는 상당히 부정적인 대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눌린 감정과 분노가 쌓여 ‘화’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는 마냥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만약 인체에 화가 없다면 어떨까? 인체는 체온 조절이나 혈액 순환 기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생명현상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측면에서 화는 유익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렇게 인체에 유익한 화를 한의학에서는 ‘명문(命門)의 화’라고 한다. 이는 선천의 기가 저장된 곳이고, 생명의 근본으로 본다.
그러나 화가 일정한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에는 화병, 소위 말하는 울화병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한 한의학적인 병리 기전을 살펴보면, 먼저 기의 순환 장애가 선행한다. 기의 순환이 막혀 울체되면 인체의 수(水)와 화(火)가 화합되지 못해 분리되고, 화가 위로 뜨면서 얼굴에는 열이 난다. 반대로 아래로는 화가 부족해 손발이 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더 진행되면, 체내 수분 균형이 무너지면서 담이나 어혈이 형성된다.
화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방향성을 가진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에너지가 인체 부위에 따라 편향되거나 치우치는 상태가 지속되면 나쁜 에너지로 변하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또 다른 과보를 형성하면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다.
과거에 시집살이를 힘겹게 한 여자분들은 자신의 딸을 심하게 구박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딸은 심적 왜곡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와 갈등 양상은 많은 가족들이 흔히들 겪고 있는 실정이다.
화는 본인이 편안하고 청정하면 생기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지 않으며 전달되지도 않는다. 화는 자연히 전달되는 것이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심적 상태를 체크하는 진단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주변 사람이 화를 자주 내면, 본인이 괴롭거나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리는 전조 증상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 주의할 점은 본인이 화를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화가 묻어 난다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화가 있다면 대화를 나누거나 밥상을 차려준다든지 할 때, 상대를 대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어색하다. 모든 반응마다 본인도 모르게 화가 담겨 있다. 만약 화가 담긴 눈빛이나 태도로 순양의 기운을 지닌 어린 자녀를 대한다면 아이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화는 단순히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한다.
화병의 증상으로는 가슴이 답답한 느낌, 목에 덩어리가 뭉친 느낌, 치밀어 오르는 느낌, 짜증, 불면, 피로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심하면 공황 증상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것은 화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제거되고 난 이후에 순식간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몸 상태가 쇠약하거나 피곤해지는 경우에 종종 발생해 본인이 당황해하는 경우가 많다.
화라는 것은 타인의 신(身), 구(口), 의(意) 세 가지 업에 의해서 상처를 받아서 생기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화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과 화해하고 용서한다든지, 또는 서로 소원해져서 관계가 단절되더라도, 대개는 세월이 지나면 마음에 응어리진 화가 없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럴지라도 몸에는 화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리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런 연유로 화병 환자 중에는 세월이 지나 마음이 다 정리되었는데 왜 지금에서야 화병이 생겼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화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화를 억누르지 않고 본인이 소화시키는 방법이 최고이다. 서양에서는 화를 발산하는 방법을 추천하는데, 이 또한 후유증이 발생해 주위 사람들에게 화가 전달되거나 악영향을 미친다. 즉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또 다른 업을 잉태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한의학 치료법 중의 하나인 화법(和法)으로 화를 해소하거나, 화의 원인을 자세히 살펴서 본인이 수긍하거나 이해하는 것도 화를 제거하는 기본 방법 중의 하나이다.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화는 순기시키는 한약이나 침으로 화를 제거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도 있다. 임상적으로 보면 화가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주어진 일을 결정하거나 인간관계를 맺게 되면 대부분 후회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사실 자체를 바로 볼 수 있는 정견(正見)은 화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정견을 통한 지혜로움을 갖추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를 쌓는 일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
한의학에서의 화병은 단순한 발열과 다른 개념이며, 치료에 관해서도 양방의학에서 화병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화를 제거하기 위해 기울(氣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은 한의학만의 독특한 이론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만병의 원인을 노(怒)로 여기고, 인체의 치명적인 병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한의학에서도 인간의 감정 중에서 노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어 불교와 한의학에서 화에 대한 접근 방법은 상관성이 높다고 하겠다.
불교의 수행과 한의학적 방법을 접목해 일상생활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예방 및 치료 방법을 제안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흔히 숨을 쉬면서 대부분 잘 인지하지 못하는데, 호흡할 때 공기가 콧구멍으로 지나가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화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둘째, 화기의 상충으로 어깨가 뭉치는 경우나 전신에 기혈 장애가 오는 경우에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담가 증간 정도의 힘으로 짜서 목 뒤 부위를 전신 마찰한다.
셋째, 머리에 찬 화기를 내리기 위해서 빠른 속도로 걷거나, 발바닥 부분을 볼펜으로 자주 자극하면, 상충된 기가 내려온다.
마지막으로 108배를 추천한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한 번에 108배로 올리기보다는 처음에는 30배 올리고 횟수를 거듭하며 천천히 올리는 것이 기혈 순환에 효과적인 방법이다. 단, 관절에 무리가 되거나 혈압이 높은 분은 삼가는 것이 낫다.
필자가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에서 주최한 의료 봉사를 다녀온 인도 아삼 지역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희한하게도 화를 내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겪어보니 그들은 앞날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형편이 가난해도 손님을 지극하게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필자에게 오랜만에 잔잔한 전율을 주었다.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래 남아 있어 그 후로도 가끔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일상생활에서 큰 기운을 얻곤 한다.
구병수|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한방신경정신과) 및 박사(한방 내과) 과정을 졸업했다(한의학 박사). 동국대 일산한방병원 병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동국대 한의과대학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유문사친』, 『의학심리학』, 『전간치료영험방』, 『중서의학결합 정신병치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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