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견해는 고집멸도,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지혜
견해(見解)는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나 관점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느냐는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괴로움과 행복에 대한 견해는 사람들의 괴롭거나 행복한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만약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행복을 행복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괴로움을 행복으로, 행복을 괴로움으로 잘못 보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의 가르침은 특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행복]에 대한 바른 견해, 즉 정견(正見)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부처님께서는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지혜, 즉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지혜, 집성제(集聖諦)에 대한 지혜, 멸성제(滅聖諦)에 대한 지혜, 도성제(道聖諦)에 대한 지혜라고 설하셨다.
괴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견해, 고성제
고성제에 대한 지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괴로움은 생로병사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삶에서 경험하는 슬픔·비탄·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 등을 말한다. 하지만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단지 고통뿐만 아니라 괴로움의 특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괴로움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핵심인 연기(緣起)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인 ‘존재’의 실상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色]과 몸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정신[名]의 결합이며, 이러한 물질과 정신은 ‘조건[緣]을 의지해서 일어난다[起]’라고 연기를 설하셨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은 조건에 의해 형성된 법이므로 조건이 사라지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은 영원할 수 없으며 무상(無常)하다. 또한 무상한 것들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므로 불만족스럽고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없고 괴로움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무상한 현상이 가진 본질적인 불완전함을 괴로움[苦]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살면서 경험하는 행복한 느낌도 무상하므로 행복한 상태는 불확실하며 언젠가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행복한 느낌일지라도 무상하므로 괴로움의 특성이 있다.
더 나아가 무상하고 괴로움인 물질과 정신은 내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주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몸이여 절대 죽지 말라. 행복한 느낌이여! 영원히 지속되거라’라고 아무리 명령하더라도 몸은 죽기 마련이고 괴로운 느낌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물질과 정신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자아, 영혼, 진아’ 등은 없으므로 물질과 정신은 무아(無我)이다. 종합하면 존재의 실상은 물질과 정신의 결합일 뿐이며, 이들은 조건에 의해 형성된 법이므로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이다. 특히 존재의 실상인 물질과 정신이 괴로움임을 천명한 진리가 바로 고성제이다. 그런데 무상·고·무아 중에 왜 괴로움을 강조해 드러냈을까? 그것은 불교의 목적이 괴로움의 소멸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괴로움을 특별히 강조해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존재의 실상이 물질과 정신의 결합이며, 물질과 정신은 무상·고·무아라고 보는 견해, 특히 괴로움이라고 보는 견해가 바로 첫 번째 바른 견해, 즉 고성제에 대한 지혜이다.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바른 견해, 집성제
집성제에 대한 지혜는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말한다. 그러면 괴로움은 왜 일어날까?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갈애(渴愛)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설하셨다. 다시 말해서 물질과 정신은 무상한데 영원하다고 잘못 알고, 괴로움인데 행복이라고 잘못 알고, 무아인데 자아가 있다고 잘못 아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물질과 정신이 영원하고 행복이고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갈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성제에 대한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영원히 행복하게 머물기를 갈망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감각적 대상을 계속 즐기기를 갈망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자신이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물질이나 정신은 없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갈망하는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 등이 일어난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이므로 이와 같은 갈애는 절대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 그래서 갈애가 충족되지 않을 때 존재들은 수많은 육체적 괴로움이나 슬픔·비탄·탄식 등의 정신적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고성제를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성냄] 등의 수많은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리석음과 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일어난다’라고 천명한 진리가 집성제이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가 두 번째 바른 견해, 즉 집성제에 대한 지혜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바른 견해, 멸성제
멸성제에 대한 지혜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말한다. 앞서 어리석음과 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말했으므로 어리석음과 갈애가 소멸하면 괴로움이 소멸하게 된다. 이처럼 어리석음과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임을 천명한 진리가 멸성제이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보는 견해가 세 번째 바른 견해, 즉 멸성제에 대한 지혜이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구체적인 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 도성제와 팔정도 수행 방법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구체적인 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괴로움을 소멸하신 수행 방법을 팔정도(八正道)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설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수행 방법인 도성제이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기억, 바른 삼매를 말한다. 앞서 집성제는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천명한 진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갈애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어리석음을 버리면 된다. 그런데 어리석음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 특히 고성제에 대한 무지를 뜻하므로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지혜, 특히 고성제를 꿰뚫어 아는 지혜를 계발하면 어리석음이 버려지고, 어리석음이 버려지면 갈애를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팔정도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 특히 고성제를 통찰하는 지혜를 계발함으로써[이해하고] 갈애를 완전히 놓아버리는[내려놓기] 수행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해하고 내려놓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먼저 바른 견해, 즉 사성제에 대한 지혜의 관점으로 세상에서 경험하는 물질과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사유함으로써 ‘지혜(智慧)’를 계발하고, 지혜를 기반으로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계를 이어감으로써 ‘계(戒)’를 잘 지킨다. 그런 다음 ‘청정한 계와 지혜’를 기반으로 바르게 정진하고 바르게 기억함으로써 ‘바른 삼매’를 계발할 수 있다. 그러면 바른 삼매, 특히 선정(禪定)을 얻을 수 있고, 선정을 기반으로 깨달음의 지혜인 바른 지혜, 즉 사성제에 대한 완전한 지혜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바른 지혜[이해하고]가 생기면 어리석음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게 되어[내려놓기]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멸성제를 실현할 수 있다. 이처럼 팔정도가 바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수행인 도성제이다. 따라서 팔정도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수행이라고 보는 견해가 바로 네 번째 바른 견해, 즉 도성제에 대한 지혜이다.
바른 견해 통해 도성제 계발해 고성제를 철저히 알고
집성제는 버림으로써 멸성제 실현할 수 있어
이상을 종합해보면 바른 견해는 다음과 같은 지혜를 드러내고 있다. 고성제와 멸성제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드러내는 진리이다. 불교의 목적인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하려면 먼저 괴로움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고성제는 철저히 알아야 할 진리이고, 멸성제는 실현해야 할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집성제와 도성제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수행에 대한 진리이다. 다시 말해서 집성제는 괴로움이 일어나게 하는 어리석음과 갈애 그리고 성냄 등의 ‘해로움[不善]’에 대한 진리이고, 도성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팔정도 등의 ‘유익함[善]’에 대한 진리이다. 이를 통해 해로움은 버리고, 유익함을 계발하는 방향으로 바르게 정진할 수 있다. 그래서 집성제는 버려야 할 진리이고, 도성제는 닦아야 할 진리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바른 견해를 통해 도성제를 계발해 고성제를 철저히 알고 집성제는 버림으로써 멸성제를 실현할 수 있다.
일묵 스님|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이후 범어사 강원을 졸업했고 봉암사, 미얀마 파욱국제명상센터, 영국 아마라와띠, 프랑스 플럼빌리지 등 국내외 수행처에서 수행했다. 현재 초기 불교 가르침을 전하는 제따와나선원 선원장으로 있다. 저서로 『이해하고 내려놓기』,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 『사성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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