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사회적 지평 확대|불교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

한국 불교 (2)

한국 불교의 사회적 지평 확대

김경집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최고층을자랑하는 고려 석탑, 보현사팔각십삼층석탑


국가·사회적 제도로 정착된 고려 불교

건국 초기 고려 불교는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되었다. 여러 가지의 법회, 법석, 도량, 재의 등을 통해 사회적 난제와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구제하고 해결하고자 했다. 그것이 진호국가(鎭護國家) 불사다.

고려 시대 불교는 국가적 제도로 편입되어 발전의 토대를 이룰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승과, 왕사·국사 제도, 그리고 승록사와 같은 승직을 들 수 있다. 

고려 불교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는데 기여한 것은 종파의 설립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우세승통(祐世僧統)이 되었다. 많은 전적을 열람하면서 해동의 많은 법사가 남긴 기록에 억설이 많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유학을 떠났다. 요나라·송나라 등지에서 유통되는 것과 일본에서 유통되는 전적 등 4,000여 권의 장소를 수집한 의천은 먼저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교장을 간행했다. 이후 선암사와 홍원사를 거쳐 해인사에 주석하던 의천은 숙종의 간청으로 다시 흥왕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 후 숙종 2년(1097) 2월 국청사가 낙성되자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설하면서 천태종(天台宗)을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선을 닦아가던 담진과 그의 제자 탄연이 종풍을 크게 떨치며 조사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한 결과 동국의 선문이 중흥했다. 여기에 지인(之印)과 학일의 노력이 합쳐져 조계종이 설립되었다.

고려 불교는 끊임없는 자정의 노력으로 본연의 자세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지눌은 1182년 승과에 합격했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고 보제사 담선 법회에서 뜻을 같이한 10여 명과 결사를 약속했다. 그런 정혜결사는 1190년(명종 20)에 팔공산 거조사에 있을 때 선객들의 청을 받고 머물게 되면서 법회를 열고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결사문을 지으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1200년 정혜사를 길상사(吉祥寺)로 옮기고 그 이름을 수선사로 개명했다. 이런 결사 운동을 통해 당시의 문란한 승풍을 회복하고 일상생활에서 선 수행이 생활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저변을 확장한 고려 불교지만 승려에 대한 지나친 우대는 본분을 망각하고 극단의 사치 생활로 치닫게 했다. 이런 사원의 모습은 불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 고려 말 유입되기 시작한 성리학에 경도된 사대부에 의해 점차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대중적 신앙으로 확산된 조선 불교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다. 고려 왕조와의 단절을 상징하듯 많은 불교 배척이 이루어졌다. 불교 배척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다. 먼저 종파의 축소와 사원전이 몰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종파의 성격이나 기능 그리고 의의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행해져 불교계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이런 배불 정책 속에서 세조의 불교 진흥은 무너져 가는 교단을 멈추게 했다. 간경도감을 통해 불교 전적을 간행해 명맥이 계승되도록 했다. 그러나 세조의 서거 이후 성종, 연산, 중종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배불로 다시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선 불교를 중흥시킨 것은 문정왕후였다. 보우(普雨)를 등용해 지금까지 배불 정책에 의해 사라진 선교 양종과 승과(僧科)를 복원했다. 명종 7년(1552) 부활된 승과에서 선종 합격자 21명, 교종 합격자 12명이 배출되었다. 조선 불교 중흥의 큰 인물인 서산대사 휴정(休靜)도 이때의 승과를 통해 배출되었고, 그의 제자 사명당 유정(惟政)도 승과 출신이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 4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중흥책은 지속될 수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침체기에 빠진 불교는 민중들의 신앙으로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의식에서 진언을 독송하는 신앙이 강해지면서 민중들은 자세한 내용을 몰라도 그 진언을 독송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신앙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 신앙적 경향을 반영하듯 조선 후기 불교 전적들이 한글로 번역될 때 가장 많은 것이 밀교 신앙과 관련된 진언집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신분 질서의 변화와 함께 민중들의 신앙이 강성해지면서 민간에서 진언집이 발간되는 일도 있었다. 이는 임란 이후 민중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온 불교의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 후기 불교 교단의 힘이 약해지면서 거사들의 활동이 강해졌다. 

거사들의 결사 운동으로는 묘련사(妙蓮社)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조선 말기인 고종 9년(1872) 한성에 사는 거사들이 관세음보살의 신묘력을 감응하고자 맺은 결사다. 그들은 고종 9년(1872) 11월에 삼각산 감로암을 시작으로 고종 12년(1875) 여름까지 일곱 곳에서 개단해 11회의 법연을 열었다. 

이 무렵 일반 대중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내세적 신앙관이 조화될 수 있는 실천적 신앙을 갈망했다. 그런 분위기가 반영되어 나타난 신앙이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다. 이런 신앙적 실천은 교단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활력소가 될 수 있었다.  


김경집|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철학 박사)하고 동국대, 중앙승가대, 성균관대, 위덕대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근대불교사』,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 『한국불교통사』 등 저서 20여 권과 한국 근·현대 불교와 관련한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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