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와
우전왕의 황홀한 황금 옷
남도의 금강, 해남 달마산 미황사 창건 설화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달마산, 『동국여지승람』에 남송 사람들 다녀갔다는
기록 있을 정도로 중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달마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 즉 ‘진리’라는 뜻이다. 달마대사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27대의 법을 이은 반야다라존자에게 출가했다. 이후 수행, 증득에 의해 전법 상속으로 28대 조사가 되고, 또한 중국 선종의 초조가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중국 남송 사람들이 달마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지원(1264) 신사년 겨울에 남송의 배 한 척이 달마산 동쪽 바다에 도착했는데,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하던데 이 산이 그 산인가” 하며 한 고관이 주민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라고 하자 고관은 달마산을 향해 예를 표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성만 듣고 멀리서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리 와서 보니 여기서 나고 자란 그대들이 참으로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실로 달마대사가 항상 머무를 만하구려” 하며 참배하고 달마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담아 갔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이 중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미황사를 품은 산이 달마대사의 법신이 항상 계시는 곳임을 이런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남도의 금강’이라 불리는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미황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해남 달마산 |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美]와 의조 화상의 꿈에 나타났던
우전왕[金人]의 황홀한 황금 옷[黃]을 따서 절 이름 ‘미황사(美黃寺)’라 지어
달마산은 삼황(三黃)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그 삼황은 불상과 기암괴석 그리고 석양빛 세 가지의 조화를 말한다. 달마산에는 미황사와 도솔암 등 1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도솔암에서 약 50m 아래 바위틈에는 용담이 있다. 사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이곳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의조 화상(義照和尙)이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다고 전한다. 경덕왕 8년(749년) 의조 화상이 달마산의 미타굴에서 제자들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로 만든 배(石船) 한 척이 달마산 아래 갈두마을 사자포구에 들어왔다. 배 안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범패 소리가 들려왔으며, 또 향냄새가 그윽하게 풍겨왔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나룻배를 저어 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탄 배가 다가가면 그 배가 포구에서 멀어지고 사람들이 물러나면 다시 포구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나가고 들어오기를 몇 번 반복한 뒤에 배는 포구에 멈추었다. 며칠 동안 이러하기를 반복하자 마을 촌주들이 모여 달마산 정상 부근 난야(蘭若)에서 공부하고 있는 의조 화상을 찾아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의조 화상은 목욕재계하고 스님들과 동네 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서 배를 향해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자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이 성스러운 배가 무사히 포구에 다가와 정박해 중생들에게 가르침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스님이 이렇게 기도를 올리며 배를 맞이할 예를 갖추자, 비로소 배가 서서히 포구로 다가와 정박했다. 스님 일행이 배에 들어가 보니 사람은 없고 금으로 만들어진 사람 형상이 노를 잡고 있었으며, 배 안에는 검은 돌과 금함이 있었다. 금함을 땅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금함에서는 불상과 경전, 탱화 등이 나왔다.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 성중, 16 나한의 탱화, 금환(金環) 등이 나왔다.
의조 화상이 제자들과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고, 검은 돌을 배 밑바닥에서 꺼내어 뭍으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해버렸다. 그날 밤, 의조 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황금 옷을 입은 분[金人]이 나타나 말씀하시었다. “나는 본래 남방의 우전국(인도)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만한 곳을 찾아보았소. 그러나 이미 사찰들이 들어서서 부처님을 모실 만한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해 되돌아가던 길이었소. 그런데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만일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부처님을 모시고 절을 세우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의조 화상이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는데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땅바닥에 누웠다 곧 일어났다. 의조 화상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그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지었다. 그러고 난 뒤 산골짜기를 가다 다시 소가 멈춰 서서 서쪽을 향해 아름다운 소리로 세 번 울고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스님은 그 자리에 소를 정성스럽게 묻어주고 경전과 불상을 봉안하고 미황사를 창건했다.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美]와 의조 화상의 꿈에 나타났던 우전왕[金人]의 황홀한 황금 옷[黃]을 따서 절 이름을 ‘미황사(美黃寺)’라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 창건에 큰 역할을 했던 소가 묻힌 곳을 ‘소잿등’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소에 대한 의례가 연행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미황사 창건 설화는 우리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전래되었다는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미황사 부도전 |
묘향산 원적암에서 열반에 든 서산 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 상좌인 소요 대사는 서산 대사의 의발을 대둔사(현 대흥사)에 모시고, 법 손상좌 편양 선사로 하여금 법을 펼 수 있도록 도량을 만들어주고,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서산 대사의 직계 상좌들과 함께 미황사에 모여 살게 된다. 미황사의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의 분들이 소요 대사의 법맥을 잇고 있는 분들이다. 한편 세속과 멀리 떨어진 해남 땅끝 마을 미황사는 템플스테이를 가장 잘하는 사찰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달마산의 능선을 아우르는 약 18km의 둘레길, 소위 ‘해남의 달마고도’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힐링’의 순롓길이 되고 있다.
백원기|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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