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를 위한 일본의 정토불교|일본 불교

일본의 정토불교

법우 스님
용월사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부를 위한 불교
범부도 성불할 수 있을까? 의지가 나약하고 우둔한 데다가 선을 행하기보다는 악을 범하기 일쑤인 범부, 올곧게 수행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처지여서,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번뇌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한 범부, 과연 이러한 범부는 성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까닭에 어리석은 범부에게도 성불의 길은 마땅히 제시되어야 한다.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아미타불의 정토불교는 바로 이러한 범부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을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하며 폭넓게 신행되었다.
불교 동점의 끝자락에 위치한 일본에서도 정토불교는 크게 성행했다. 오늘날 일본의 불교 지형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정토불교라는 것만 보아도 그 영향이 실로 대단한 것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정토불교는 특히 정토종(淨土宗), 정토진종(淨土眞宗), 시종(時宗)으로 대표되는 정토계 종단들에 의해 견인되었다. 정토종은 호넨(法然, 1133~1212)을, 정토진종은 신란(親鸞, 1173~1262)을, 시종은 잇펜(一遍, 1239-1289)을 종조(宗祖)로 하는데, 신란은 호넨의 직제자이며 잇펜은 호넨의 손제자인 쇼타츠(聖達, 생몰미상)의 제자다. 까닭에 이들의 사상 배경은 기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별도의 종단에서 종조로 추앙되고 있을 만큼 그 가르침의 차이도 작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들 속에서 정토불교의 일본적 특징이 발견되기도 한다.

전수염불(專修念佛)의 종단을 만든 호넨
호넨은 일본 불교사 최초로 칭명염불(稱名念佛)을 통한 극락왕생을 종지로 하는 정토불교 종단을 만든 인물이다. 호넨 이전의 칭명염불은 어느 수행의 보조적인 수단, 혹은 하근기의 사람을 제도하는 방편의 하나 정도로 여겨져왔는데, 호넨은 이를 아미타불이 중생구제를 위해 ‘선택’한 가장 수승한 행으로서 재평가한다. 그리고 말법 시대의 범부 중생들에게는 이러한 아미타불의 본원에 순응해 극락에 왕생하는 것만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호넨은 선도(善導, 613~681)의 『관무량수경』 해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극락왕생에 있어서 보시나 지계, 선정과 같은 선행들을 잡행(雜行)으로 규정한다. 또 『정토삼부경』 등에서 극락왕생을 위한 바른 행으로 설해지고 있는 독송, 관찰, 예배, 구칭, 찬탄공양의 오종정행(五種正行)이라 할지라도 구칭, 즉 칭명염불만이 극락왕생의 정정업(正定業)이고 나머지는 왕생을 돕는 조업(助業)이라고 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칭명염불만을 오로지 행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호넨의 교설은 기존 불교계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당시 일본 조정의 최상층은 물론 귀족, 무사, 서민, 여성 등의 다양한 계층에서 빠른 속도로 수용된다. 그리고 호넨의 정토종을 시작으로 정토진종, 시종 등의 정토계 종단이 차례로 성립되면서 오늘날 일본 불교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또한 호넨에 의해 제시된 전수(專修)의 풍토는 정토계뿐만 아니라 니치렌(日蓮, 1222~1282)의 일련종, 에이사이(榮西, 1141~1215)의 임제종, 도겐(道元, 1200~1253)의 조동종 등에도 영향을 미치며 일본 불교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정착한다.

절대 타력의 정토불교를 구축한 신란
신란을 종조로 하는 정토진종은 현재 10개의 교단으로 나뉘어 존재하는데, 이들 교단에 소속된 사찰을 모두 더하면 2만 개가 넘는다. 스승인 호넨을 종조로 하는 정토종의 사찰 수가 8,000여 개인 점과 비교해보면 두 배 이상 그 교세가 큰 셈이다.
신란의 가르침은 칭명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이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스승 호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호넨에 의해 펼쳐진 타력의 불교가 신란에 의해 순화(純化)되었다고 평가될 만큼, 보다 철저한 인간 내면의 성찰을 통한 절대 타력의 정토불교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신란은 염불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조차도 범부가 스스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곧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아미타불의 구제력이 범부 중생에게 작용해 염불왕생의 신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호넨의 경우, 중생 스스로가 범부임을 아는 것도, 칭명염불만이 출리의 길이라고 믿는 것도, 염불을 행하는 주체도, 결국 범부 자신의 내면적 자각에서 출발한 자발적 행이라는 점과 크게 대비되는 입장이다.
이러한 신란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인간 내면의 범부성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우독신란(愚禿親鸞)’이라고 했다. 우독이란 ‘머리카락을 자른 어리석은 녀석’이라는 의미다. 또 그는 스스로를 부처님을 배반하며 거듭 악업을 짓기만 하는 악인(惡人)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내재된 악성(惡性)은 멈추기 어려워, 마음은 뱀과 같아서 선(善)을 닦는다고 해도 그것은 잡독(雜毒)인 까닭에 가짜의 행(行)이라고도 했다. 물론 여기서 신란이 말하는 악인은 세속적 차원의 악인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불도를 올곧게 실천하지 못하는 종교적 악인이다. 신란은 자신과 같은 그러한 악인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염불은 결국 진실한 염불이 아니고, 신심 역시 진실한 신심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스스로의 악성(=범부성)을 깊이 자각한 악인인 까닭에 잡독과도 같은 자력적 선행에 의지하지 않고, 아미타불의 구제력이라는 절대 타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란에게 있어서 진실한 신심과 염불은 범부 중생 스스로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에 의해 ‘해지는 것’인 셈이다.

명호의 절대성 발견한 잇펜
잇펜을 종조로 하는 정토종단을 시종(時宗)이라고 한다. 시종이라는 말은 본래 시중(時衆)에서 나온 것인데, 시중은 잇펜에 귀의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무리를 의미한다.
오늘날 시종은 정토종이나 정토진종에 비해 그 교세가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작지만, 잇펜이 구축한 정토불교는 호넨, 신란과 더불어 정토불교의 일본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잇펜은 ‘스데히지리(捨聖)’, 즉 모든 것을 버린 성자로 불릴 만큼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는 다른 조사들처럼 저술을 남기거나 도량을 건설하지도 않았다. 또 제자와 신도들을 조직화해 종단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51세 서거의 순간까지 전국을 유행하며 염불을 실천하고 보급했다. 유행 시에는 춤염불(踊り念仏)을 행해 사람들을 모으고, 염불을 권하는 패를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했다.
잇펜의 정토불교는 이러한 실천성과 더불어 이미 범부 중생의 왕생이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점이 특징이다. 우리 중생은 무시이래로 거듭되어온 생사 윤회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업을 지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10겁 전에 법장비구가 칭명염불을 통한 중생구제의 원을 성취해 아미타불이 된 순간, 중생들의 왕생도 ‘나무아미타불’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까닭에 그는 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신심의 유무나, 정·부정, 유죄·무죄 등을 논하지 말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불가사의한 명호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칭하라고 권한다.
그는 또 “염불행자는 지혜(智慧)도 우치(愚癡)도 버리고, 선악의 경계도 버리고, 귀천고하의 도리도 버리고, 지옥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버리고, 극락을 원하는 마음도 버리고, 또 제종(諸宗)의 깨달음도 버리고, 일체의 것을 모두 버리고 하는 염불이야말로, 미타초세(弥陀超世)의 본원에 가장 걸맞은 것이다”라고 했다.
잇펜의 입장에서 볼 때, 악업 중생도 모두 왕생케 하는 명호의 절대성 앞에서 어떠한 전제나 분별이라도 무의미한 망집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 중생에게 남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칭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호넨은 전수염불, 신란은 절대 타력, 잇펜은 명호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일본적 정토불교를 확립했다. 이들은 인간 내면의 범부성에 대한 깊은 성찰 위에 자력 성불의 불교와는 결이 다른 불교, 즉 믿음과 구원의 불교를 제시함으로써 일본 불교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우 스님|여수 용월사에서 원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일본 교토(京都)의 불교대학(佛敎大學)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문학 박사). 동국대학교, 원광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고, 한일 불교문화, 정토불교 등과 관련된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는 여수 용월사불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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