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의 노래|이호신 화백의 지리산 생태 그림 순례

대숲의 노래

그림/글
이호신 화가

대숲의 노래, 179x536cm, 2023

대나무는 저마다의 얼굴로 솟아나 숲을 이루는 대숲은 생명의 둥지

대숲에 사는 청복을 누린다.
사철 댓바람에 사위가 싱그러워
이 숲에 해와 달이 깃들고 자라니
더불어 대숲이 되고 우주가 된다.

대숲 하늘, 92x59cm, 2022

어느 날 화실 뒤란 대평상에 누워 대숲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읊조렸다.

실은 종일 대나무를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 햇살과 푸른 그림자 속에서 대나무의 생태를 살피게 된다.

죽순의 계절, 모든 대나무는 자신의 둘레(넓이)를 지니고 태어나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마디는 어김없이 약간씩 길어지며 태를 두르고 자란다. 이 질서의 법칙은 실로 어김이 없다. 저마다의 얼굴로 솟아나 대숲을 이룬다. 그리고 댓잎은 모두가 다르다. 잔가지에서 모두 다른 형태로 나부낀다.

대나무는 저마다의 나이를 지니고 있다. 녹색에 가까울수록 어리고 황갈색에 이를수록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대숲에는 세월의 바람이 깃들어 있다. 대가족의 모습과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비, 안개와 눈보라도 털고 비워내는 대나무. 언제나 텅 빈 충만으로 꿋꿋하다. 이 대숲은 생명의 둥지이다. 온갖 새들과 곤충이 깃들어 산다. 사람 또한 나그네일 뿐이다. 이 길손이 이름을 짓고 불러준다.

바람 불면 풍죽(風竹), 달 뜨면 월죽(月竹), 비 오면 우죽(雨竹), 눈 내리면 설죽(雪竹), 이슬 맺히면 노죽(露竹), 안개 속의 연죽(煙竹), 마음에 맺히면 흉죽(胸竹)이라.

죽순과 대나무, 145x75cm, 2023

이 대숲은 옛사람이 심어놓은 까닭으로 오늘의 사람이 은혜롭다. 하여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공간으로 나누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신석정 시인의 「대숲에 서서」를 노래하며.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건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이호신
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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