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봉사 활동으로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서원 세우다|나의 불교 이야기


‘세상에 잘 쓰이는 사람이 되자’는
서원 잘 지켜나가고 싶어

김동훈
재난사회복지사, 더프라미스 상임이사


삶의 이유 찾아 떠난 인도
대학생 시절 죽으려 했다. 지금에야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지만 그때는 절박한 연유가 있었다.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럼에도 나는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가 필요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다. 편입을 해서 ‘철학과’로 옮기면 그곳에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결과 편입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학교에서 내 삶의 이유가 찾아지지 않았다.

편입한 철학과에서는 서양철학, 동양철학을 고루 가르쳤는데 어떤 사정이었는지 ‘불교’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불교도 제대로 접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당시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절에 스스로 찾아갔다. 지금의 ‘조계사’였다. 조계사에 가보니 ‘대학생회’가 있었다. 일단은 사람들이 좋아 정착했고 열심히 다니는 학생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도 불교를 온전히 나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불교 의례에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삶의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쯤 생각한 것이 ‘그래도 종교인들하고 일하면 의미 없어 보이는 내 인생에 의미가 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첫걸음으로 어느 불교 기관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모습들을 많이 보았다. 절망스러운 시절이었다. ‘공부’에서도 ‘종교’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길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일단은 우리나라를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세계 어딘가를 떠돌다가 영원히 사라져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모아둔 돈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해외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봉사 활동을 가면 현지에서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했다. 어차피 해외로 떠나려는데 나가서 봉사라도 하다 보면 의미 없는 내 인생이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이 ‘인도’였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 모여사는 마을에 위치한 어느 한국의 NGO였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정토회’, ‘JTS’, ‘법륜 스님’이었다. 당시에는 어떤 곳인지 모르고 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불교와 상관없이 봉사 활동만을 생각하고 갔다. 인도에 도착했고 어차피 의미 없는 인생,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인지라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봉사 활동을 한다고 했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갈등이 늘 있었다. 당시까지 나는 봉사하러 온 사람이지 수행하러 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곧이곧대로 마음의 경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사실 인생에 미련이 없으니 무서울 것 없이 성질대로 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법륜 스님 만나 수행으로써의 불교 받아들여
법륜 스님이 인도에 들르셨다. 이때 스님을 처음 뵈었다. 법륜 스님이 요즘처럼 유명한 때도 아니었고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때였다. 인도에서도 워낙 바쁘신 분이고 실무자들하고 상의할 일도 많으신 분이라 나 같은 일개 자원봉사자와 따로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왔다.

스님이 인도에서 일을 마치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실무자들이 너무 바빠서 배웅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자원봉사자였던 내가 스님을 모시고 기차역까지 단둘이 가게 되었다. 플랫폼에서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평소에도 연착하기로 악명 높은 인도 기차였지만 이날 따라 7시간이나 연착되었다. 7시간을 고스란히 스님과 단둘이서 플랫폼에서 같이 있게 되었다.

법륜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중 지금 기억나는 것은 하나다. 한국에 나를 굉장히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나의 분노와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스님도 나의 고통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면서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했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스님이 나에게 딱 한마디 하셨다.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 왜 네가 괴로워하고 있어. 괴로워하는 건 그들이 해야지.”

순간 탁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갑자기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플랫폼에서의 대화 이외에도 이후로도 스님이 오실 때마다 여러 번 뵙게 되었다. 스님께서 평소에 생활하시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보게 되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를 돌아보게 도와주시고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느껴지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 기간 중에 처음으로 ‘불교’를 ‘나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것이 불교라면 나도 불자가 되고 싶다’는 고백 같은 것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의례로써의 불교’가 아닌 ‘수행으로써의 불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자 연장 문제 때문에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 스님께서 ‘깨달음의 장’이라는 정토회의 수행 프로그램에 갔다 오라고 권유하셨다. 난 돈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이국에서 죽어라 봉사하며 고생하던 사람에게 잠깐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 쉬게 하지는 못할망정 고생할 것 같은 이상한 수행 프로그램에 갔다 오라고 하니 거부감도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회 초년생이면서 백수와 다를 바 없는 나로서는 참가비를 낼 돈도 없었다.

스님은 ‘그럼 내가 돈을 내줄 테니 그냥 한번 갔다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깨달음의 장’이라는 프로그램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4박 5일 프로그램을 겪으면서 더 크게 깨어져나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저 스승께 감사드릴 일이었다.

인도 봉사 활동으로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서원 세워
2년 동안의 인도에서의 봉사 활동이 끝났을 때, 내 인생은 2년 전과 비교해서 180도 변해 있었다. 한국에서 나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사회 초년생이고 백수이며 경험이라고는 사회생활 1년 좀 하다가 잘 이해도 되지 않는 봉사 활동하던 친구 정도로 앞으로 뭐해 먹고살지 매우 걱정되는 인생으로 별로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외부 시선과 상관없이 나는 내 인생에 대한 질문 자체가 바뀌어 있는 다른 사람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오는 일이 ‘해외 자원봉사’, ‘재난 구호’ 등이다. 나같이 ‘인생이 벼랑 끝’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봉사 기간을 통해서 인생이 변했으니,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도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구호 활동 경험밖에 없으니 그 경험을 잘 살려서 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은 죽는 날까지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가진 그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 중에 내가 한 개를 맡아보겠다는 결심이었다. ‘세상에 잘 쓰이는 사람이 되자’는 법륜 스님의 말씀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계속 지켜나가고자 한다.

김동훈
한국에 두 명밖에 없는 ‘재난사회복지사’ 중의 한 명. 인도JTS에서의 활동 이후에도 지구촌공생회,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피스윈즈재팬(일본의 대표적인 국제 구호 NGO) 등 여러 단체에서 국제 구호 활동을 담당해왔다. 현재 ‘더프라미스(The Promise)’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으며 동국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2023년에 20여 년간의 국제 구호 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불이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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