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한마음 - 유식과 일심|동양의 마음

불교의 한마음
- 유식과 일심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드디어 마음
마음 이야기는 많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이다’라고 제대로 마음을 말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유가의 맹자는 ‘사람은 본디 착하다’면서 그 착함의 근거로 본성 ‘성(性)’ 자를 쓴다. 그러나 그의 마음(心)은 오히려 도망가니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방심(放心)’(『맹자』, 「고자상」)하면 안 된다.

도가의 장자는 ‘마음을 놀리자’(유심遊心: 『장자』, 「인간세」, 「전자방」, 「칙양」)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편견으로 가득한 ‘성심(成心)’(「제물론」)도 있다. 마음은 여유롭고 풍요로워야 하는데 여전히 한쪽으로 쏠리거나 고집스럽다.

유가인 순자의 마음(心)은 아예 도덕의 주체가 아니라 인식의 주체다. 현대적 표현으로 바꾸면 지성, 지각 등 앎과 관련된 기관이다(징지徵知: 『순자』, 「정명」). 오늘날 우리가 뇌에게 부여하는 역할과 같다.

왜 그럴까? 그것은 마음이 좋은 역할만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선심(善心)도 있지만 욕심(欲心)도 있다. 착한 마음을 가리키는 천심(天心)도 있지만 나쁜 마음을 가리키는 흑심(黑心)도 있는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두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 오늘은 천사 같은 마음이고, 내일은 악마 같은 마음으로 오갈 수 있다. 아니,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오간다. 그래서 함부로 마음 타령하면 안 된다.

오늘날 욕심이라는 한자에 마음 심 자가 밑에 들어가는 ‘욕심(慾心)’을 쓰는 것은 우리의 욕구에는 욕망이라는 마음이 개입됨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과거 맥락에서 ‘욕(欲)’은 중립적으로 그저 하고자 함이었다면, 성리학 이후 유가적 논리에서 ‘욕(慾)’은 탐욕의 시발이다. 그래서 퇴계, 율곡 선생이 따랐던 주자학의 모토가 바로 ‘사람의 욕심을 없애고 천리를 드러내는 것(去人欲而存天理)’이다.

그런데 드디어 마음을 전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마음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이랬다가 저기서는 저랬다 하지 않고, 이중적인 역할을 부여함이 없이 마음에게 모든 것을 넘긴다. 시쳇말로 마음에 ‘몰빵’한다. 이제 마음만 잡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 그렇게 불교의 마음 이론이 등장한다.

불교는 ‘마음이 다다’라는 본격 심론이다. 우리말에서 마음이라는 말이 갖는 거대한 의미 구조나, 마음이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심리 상태는 모두 불교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먼저 마음의 역할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쉽게 증명된다. ‘야,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어’, ‘넌, 네 마음도 몰라주고’, ‘그래, 마음이 가니?’, ‘우린, 마음이 통해서’, ‘마음을 주고받고’, ‘마음만 받을게’, ‘마음이 쓰여’ 등등.

이것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마침내 ‘마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주인도 마음이고, 대화의 주체도 마음끼리고, 탐구의 대상도 마음이고, 우리가 얻어야 할 것도 마음이다. 우리말만이 아니라 일본어에서도 ‘코코로(心)’가 이곳저곳에서 쓰이는 것도 우리와 같은 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불교가 무엇이길래 어떻게 이렇게 우리에게 마음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나?

유식학의 등장
불교에서 가장 잘 발달한 분야는 마음 이론이다. 그렇기에 불교를 말하면 현대 심리학의 무의식이나 집단 무의식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사람의 의식이 여러 층차임을 밝힌다. 표면의 의식은 말할 것도 없다. 깊게 들어갈수록 숨어 있는 의식이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유식학은 그 단계를 8층으로 본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이 문제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잡으면 된다. 우리의 의식은 눈, 귀, 코, 혀, 몸과 관련해 5식이 있는데 그 5식을 주재하는 6식이 있고, 6식은 ‘나’라는 7식이 되며, 8식은 ‘나의 사라지지 않는 씨앗’이라는 뜻에서 종자(種子)다. 단순히 말해 6식까지는 원시불교가 말하는 심(心)이었는데, 거기에 7식인 의(意)와 8식인 식(識)을 넣어 8식으로 설명하는 유식학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유식학의 역사는 이렇다. 4세기 인도에서 무착(Asanga)과 세친(Vasubandhu) 형제가 정립하고,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와 중국에서 번역하고, 신라의 원측이 중국에 가서 배운다. 그런데 원효는 중국에 가지 않고도 신라에서 발전시킨다. 이후 신라의 3지(지통, 지달, 지봉) 선사가 일본에 이를 전한다.

게다가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주장하는 유식학에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는 『화엄경』의 사상이 혼합되어, 우리의 식당 곳곳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진리의 말씀을 걸게 만든다.

유식학,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만들었고, 마음밖에 세상은 없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마음이 맑으면 세상도 맑고, 마음이 괴로우면 세상도 괴롭다. 마음이 일어나면 참이 생기고, 마음이 잠잠하면 참도 사라진다. 사람도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잡은 마음이 일심(一心)이다.

한마음으로
아이가 눈을 가리면서 ‘엄마, 없다’를 외친다. 아이가 눈을 뜨며 ‘엄마, 있다’를 외친다. 엄마만이 아니다. 세계도 그렇다. 내가 눈을 감으면 세계는 사라지고, 눈을 뜨면 있다. 달리 말해,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다.

우리의 인식이 대단할 것 같지만 그저 세계를 정리하는 틀일 뿐이다. 거기에 ‘범주’니 ‘개념’이니 ‘구성’이니 하는 말을 덧붙일 뿐이다(칸트처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나는 나대로, 잠자리는 잠자리대로.

그래도 마음 하나는 남는다. 이를 유식실성(唯識實性) 또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하나의 마음이 곧 ‘늘 그렇고 그렇다’는 여여(如如)한 진여(眞如)가 된다. 그래서 내가 부처다. 나아가 그 마음을 조금만 넓히면 원효처럼 ‘중생심(衆生心)’을 얻는다. 나만이 아니라 남도 그 마음의 영역으로 모셔 오는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잘못 공을 잡았다’는 뜻에서 악취공(惡取空)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몰라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핵심은 ‘없음에조차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선결 과제는 당연히 ‘있음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아무리 같은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진아(眞我)’보다는 ‘무아(無我)’, ‘자성(自性)’보다는 ‘무자성(無自性)’이라는 말을 자주 써야 청년 싯다르타의 깨우침을 놓치지 않는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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