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됨을 참기 어려운 이유|인욕, 참는다는 것의 의미

욕됨을 참기 어려운 이유 


이필원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교양융합교육원 부교수


‘욕됨을 당했다’고 생각할 경우의 예, ‘석가족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

잘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욕되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정의로는 ‘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럽다’라는 의미다. 사극과 같은 드라마에서 ‘욕을 보이다’라는 표현도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이해된다. 

사전적 정의를 바탕으로 욕됨을 보게 되면, 그 의미가 세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부끄러움, 둘째 치욕(수치와 모욕), 셋째 불명예다. 이 세 가지 의미 가운데, 첫째는 나머지 두 가지와 다소 맥락을 달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부끄러움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보는 사람이 경험하는 긍정적 반응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언급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보면 ‘부끄러움을 알라’라는 말씀이 매우 자주 언급된다. 


다른 사람을 화내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며,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Sn.133게송)


부끄러움(hiri)과 창피함(ottapin)을 모르는 자야말로 ‘천한 자’라는 가르침이다.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볼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치욕과 불명예는 ‘치욕을 당하다’ 혹은 ‘불명예스러운 퇴진’과 같이 타인으로 인해 겪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특히 위신이나 체면, 품위 등이 손상되어 스스로 자기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고통스러운 자의식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과도한 비난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치욕스럽다고 생각하거나 불명예스럽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욕됨’을 말할 때는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고쳐,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욕됨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자의식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어, 크게 분노를 하거나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불전에 전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석가족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때 가비라위성 안에 큰 강당을 새로 세웠는데, 그곳엔 아직 하늘도 사람도 마(魔)도 혹은 마천(魔天)도 전혀 머무른 적이 없었다. 여러 석가족들은 제각기 서로 의논하였다.

“지금 이 강당은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림과 단청도 이미 마쳐 마치 천궁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먼저 여래(如來)와 비구 수행자를 청하여 이곳에서 공양하시게 하여 우리가 무궁한 복을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리하여 석가족들은 곧 강당 위에 갖가지 자리를 펴고, 비단과 번기와 일산을 달고, 향수를 땅에 뿌리고, 온갖 유명한 향을 피우고, 또 좋은 물을 준비하고, 모든 등불을 밝혔다.

이때 유리 태자는 5백 동자를 데리고 강당으로 가 곧장 사자좌(師子座)에 올랐다. 여러 석가족은 그것을 보고는 크게 화를 내며 달려 나가 팔을 붙잡고 문밖으로 내쫓으면서 모두 함께 꾸짖었다.

“이 종년의 자식아, 하늘도 사람도 아직 여기서 머무른 일이 없는데, 이 종년의 자식이 감히 이 안에 들어와 앉다니.”

그들은 다시 태자를 붙잡아 매를 치다가 땅에 메쳤다. 그때 유리 태자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한숨을 지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때 호고(好苦)라고 하는 범지(梵志)의 아들이 있었다. 유리 태자는 범지의 아들 호고에게 말하였다.

“이 석가족들은 나를 붙잡아 이렇게까지 비방하며 욕(毀辱)을 보였다. 만일 내가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게 되거든, 그때 너는 이 일을 내게 말해야 한다.”(『증일아함경』 권제26)


‘나’를 고집하면 조그마한 ‘욕됨’도 참지 못해, 

따라서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유리 태자는 위두다바(viḍūḍabha)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코살라국 빠세나디왕의 아들이다. 빠세나디왕이 석가족에 청혼을 했을 때, 석가족에서는 대신의 노비를 공주로 속여서 빠세나디왕과 결혼하게 했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이가 위두다바였다. 위두다바는 왕자로서 외가인 까삘라왓뚜에 갔다가 저런 치욕과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한 것이다. 이에 그는 크게 분노해, 훗날 반드시 이 치욕을 피로 갚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위두다바는 자의식에 크게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자의식은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근거한다. 아상(ātma-saṃjñā)은 ‘불변의 자아가 있다는 관념’을 말한다. 아집(ātma-grāha)은 ‘불변의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아상과 아집은 ‘아견(我見, atta-diṭṭhi)’, 곧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난 이래, 수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자아’라는 환상을 견고하게 만들면서 살아간다. 그 결과 경험적 자아의 배후에 ‘불변의 자아’, 혹은 ‘영혼’과 같은 것이 있다고 확신을 갖고 믿게 된다. 그리고 이 자아가 상처를 받게 되면 욕됨을 받았다고 생각해, 위의 위두다바와 같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극단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를 고집하게 되면 조그마한 ‘욕됨’도 참지 못하게 된다

‘나’라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타인과의 경계를 더욱 분명히 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독립된 개체로서 자아라는 환상을 강화하다 보면,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영역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분노하게 되고, 분노할 상황이 안 되면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씀하신다.


환상(māyā)이나 자만(māna)이 없을 때, 그는 탐욕을 떠나고, 소유가 없으며, 바람이 없고, 분노를 제거하고, 자아가 소멸된다.(Sn.469a-c게송)


독립된 ‘나’라는 것은 환상이다. ‘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만 겨우 존재할 수 있는, 그래서 ‘내가 아닌 것들’을 토대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아닌 것들을 토대’로 하는 존재가 어떻게 ‘나’라는 독립된 실체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다른 존재와 단절된, 완벽하게 구별되는, 실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꾸 ‘나’를 고집하게 되면 우리는 조그마한 ‘욕됨’도 참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들이 극단적인 말을 하더라도, 목욕장에 서 있는 기둥처럼 태연하고, 탐욕을 떠나 모든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자, 현명한 자는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Sn.214게송)


스스로의 잘못을 돌이켜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근거 없는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욕망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인지 안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언제나 올바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근거 없이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퍼붓는 ‘욕됨’을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추게 된다. 

요즘 흔히 말하는 ‘내면의 힘’이라는 것은,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을 잘 다스리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올바른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무기 삼아 ‘욕됨’을 견디며, 내면의 폭력과 다툼을 내려놓고 선함을 실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필원|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교양융합교육원 부교수, 동 대학 갈등치유연구소 소장, 한국종교교육학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인도 초기 불교 전공으로, 명상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인생이 묻고 붓다가 답하다』 등이 있고, 「자살, 욕망이 지닌 또 다른 얼굴」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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