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전래와 정착|불교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

한국 불교 (1)

김경집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삼국 시대 불교 전래와 발전
한국 불교는 4세기 초 삼국 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을 보내면서 순도(順道)와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것에서 시작한다. 이어 374년 아도(阿道)가 오고, 375년 2월에 소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워 두 스님을 머물게 했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후 20여 년이 지난 고국양왕 때 백성들에게 “불법을 숭신해 복을 구하라”라는 명을 내렸다. 불교 신앙이 국가적으로 권장되었고, 불법이 복되게 사는 가르침으로 이해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후 제19대 광개토왕 2년(392)에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9월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극진히 예경했다. 다음 해 2월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10명을 출가시켰다. 백제 역시 제17대 아신왕 원년(392)에 “불법을 숭신해 복을 구하라”라는 명을 내렸다. 이 역시 불교 신앙이 국가적으로 권장되었고, 백성들에게 불교가 복되게 사는 가르침으로 이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무왕 때 이르러 미륵부처님이 하생하는 불국토라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미륵사가 세워지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신라의 불교 전래를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하면 눌지왕(417~458) 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래보다 50여 년 늦었지만 부처님과 인연 있는 곳이라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과 왕이 스스로 출가해 불법을 수행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으로 빠르게 정착되었다.

삼국의 불교 발전은 인도와 중국 구법(求法)을 통해 이루어졌다. 불법을 구하러 간 수행자는 고승을 만나 법을 배우고 귀중한 경전을 구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구법승은 승랑(僧朗)이다. 불교 전래 후 대략 80년에서 100년 정도가 지난 다음 장수왕(413~491) 때다. 그는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했고, 중국 삼론종 설립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평원왕 때 의연은 정국사(定國寺) 법상(法上)으로부터 불교의 기원과 중국 불교의 교학을 배워왔다. 이후 석파약(釋波若)과 천태 교관, 581년 이후 인법사(印法師), 실법사(實法師) 등이 수나라에 들어가 삼론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무렵 구법승 대부분은 대승불교를 연구했다. 그런 가운데 지황(智晃)과 같이 부파 교학을 연구한 스님도 있었다. 고구려 스님 가운데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간 분은 현유(玄遊)였다. 그는 중국에 갔다가 스승 승철(僧哲)을 따라 인도로 갔으며, 최종적으로 스리랑카에서 수행했다.

백제의 겸익(謙益)도 인도 불교에 대한 구법의 필요성을 느낀 수행자였다. 바다를 통해 인도에 가서 5년 동안 범문과 율부를 전공하고 인도승 배달다(倍達多) 삼장과 함께 성왕 4년(526) 귀국했다. 현광(玄光)은 중국 남조인 진(陳)나라 남악 혜사에게서 법화삼매를 증득하고 고향인 웅주 옹산으로 돌아와 절을 세우고 크게 교화했다. 특히 『법화경』의 「안락행품」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 법화 신앙을 널리 전했다.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이후 재공인된 신라 불교는 진흥왕을 거치면서 굳건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진흥왕 12년(551) 승통이 된 고구려 수행자 혜량(惠亮)은 출가와 수행 의식 등을 전해 신라 교단의 토대를 세웠다. 그에 의해서 행해진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는 신라 불교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원광(圓光)은 진평왕 11년(589) 중국으로 유학해서 대승 경교를 배웠다. 귀국해서는 신라 젊은이들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쳐 불교의 국가적 적응을 보여주었다. 안함(安含)은 진평왕 22년(600) 사신과 함께 중국에 가서 5년 동안 모든 경교를 섭렵하고 인도 승려 세 명과 중국 승려 두 명을 데리고 귀국해 황룡사에서 경전을 번역했다. 그리고 선덕왕 5년(636) 당나라로 간 자장(慈藏)은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는 등 열심히 수행했다. 신라로 들어와 대국통이 된 그는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강조했다. 그로 인해 신라 불교 교단의 모든 일이 정비될 수 있었다.

민족불교로의 정착
삼국의 불교 수용은 통치적 이념으로 활용할 목적이 컸다. 전래 후 대중들에게 불교를 믿어 복을 얻을 것을 권했지만 보편적으로 성행할 수 없었다. 자연히 불교 신앙은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었다.

삼국 가운데 신라는 불교 전래는 가장 늦었지만 신앙적 전개는 남달랐다. 신라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사상적 정립은 사회 통합과 삼국통일에 크게 작용했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불연국토사상이다. 이것은 신라 땅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부처님의 나라’라는 신앙관이다. 이 사상은 오래전 가섭 부처님 시절부터 가람의 터가 있었으며, 인도의 아육왕이 조성하지 못했던 불상을 신라의 진흥왕이 조성함으로써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곳임을 강조했다. 그 후 발전해 경주 남산에 수많은 부처님을 조성해 신라가 극락세계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불교사상이 정립되면서 신라인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부처님의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일로 여겼고, 불국토를 지키는 호국의 신중이므로 전쟁 중 사망해도 부처님의 세계에 왕생한다는 신념을 주었다.

신라 불교가 사회적으로 정착하는데 기여한 것은 ‘불교 신앙의 대중화’였다. 대중화의 주역으로는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원효(元曉) 등을 꼽는다. 이들은 당시 수행자가 최고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분위기와는 달리 촌락, 조그만 절, 시골 장터 등에 머물며 서민들에게 불교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불교를 포교했다. 그래서 이들이 가는 곳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불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 대중 교화에 힘입어 신라 불교는 왕실, 귀족, 그리고 서민의 차별 없이 온 국민이 신봉하고 이해해 통일된 정신력을 지닐 수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사상적 토대 위에 불교 교학이 크게 발전했다. 그 결과 원효(元曉)와 신문왕 때 국사를 지낸 경흥(憬興) 그리고 경덕왕 때의 태현(太賢) 등 한국 불교 3대 저술가를 배출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저술들은 불교학의 모든 분야가 연구되었고, 중국의 불교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소」는 중국의 스님에 의해 “이것은 보살의 경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저술이므로 당연히 ‘론’이란 명칭을 붙여야 한다” 해서 『금강삼매경론』이 되었다. 이는 신라 불교학의 우수한 면모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대 저술가의 모든 연구는 인도와 중국 유학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고 국내에서 이루어졌다. 자료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한 수행자들의 노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업적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발전한 통일신라의 불교는 신라인의 정신과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민족불교로 정립되었다.

김경집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철학 박사)하고 동국대, 중앙승가대, 성균관대, 위덕대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근대불교사』,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 『한국불교통사』 등 저서 20여 권과 한국 근·현대 불교와 관련한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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