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 가르침,
카르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데이비드 로버트 로이
작가
인간의 고통을 진단하는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글을 읽으면서 정신분석가이며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관찰했다. 프로이트의 이론 체계나 창의적이고 체계적인 사상가를 이해하려면, 시스템이라는 것이 본래 발전되고 표현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 원인을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창의적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논리와 사고방식으로 생각해야 하고 그 문화권에서 표현 가능한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붓다 역시 진단의 대가였고, 비록 붓다와 프로이트는 분명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런 프롬의 관점을 붓다의 ‘해탈 이념’에 적용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창의적이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람도 지적이든 영적이든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해야 한다. 불교가 무상, 연기를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붓다 역시 새롭고 해방적인 통찰을 그에게 가능한 유일한 방법으로 표현했으니 바로 자신의 문화권이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범주를 사용한 것이었다. 당연히 붓다가 법을 표현한 방식은 실로 새로운 것(예를 들면 무아, 연기)과 당대에 존재하는 종교적 사상의 혼합이었다.
업은 흔히 비인격적이고 결정론적인 우주의 ‘도덕률’이며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정확하고 계산 가능한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현대 불자들에게 극심한 인지 부조화를 초래한다. 지금까지 세상에 대해 발견해놓은 과학의 인과법에는 그런 기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불교 가르침은 붓다 당시 사람들보다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좀 더 이해가 쉽다. 예를 들어 무아에 대한 불교의 교설은 심오할 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학자인 조지 미드(George Mead)나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자아의 구조적 속성에 대해 발견한 연구와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나가르주나(용수보살) 같은 불교사상가가 언어에 대해 했던 말, 즉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범주가 최종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도록 언어가 잘못 이끌어간다는 말은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같은 언어학자의 연구와 일치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교는 현대 사상의 최고의 흐름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업의 전통적 관점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전통적으로 업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다. 하나는 많은 아시아 불교 사회에서 보이는 불행한 현상으로, 승가와 재가 사이에 자멸적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팔리어 경전은 재가자도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명시해 놓았지만 재가 불자의 주된 영적 책임은 자신이 직접 불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승가를 돕는 것이라고 흔히 이해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재가자 남녀는 공덕을 얻는데, 이는 업을 상품화하는 개념이다. 공덕을 쌓아서 이들은 내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물질적 보상을 받기를 바라고, 이는 다시 스님들의 물질적 혜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접근법은 불교를, 문자 그대로, 영적 물질주의 형태로 하락시키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업이 오랫동안 인종차별, 카스트제도, 경제적 수탈, 타고난 장애등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업은 권위와 정치적 엘리트를 정당화하고, 그들은 당연히 부와 권력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부와 권력이 없는 사람은 이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완벽한 신정론(神正論)을 제공한다. 개인의 행위와 그의 운명 사이에 오류 없는 인과가 존재한다면 사회정의를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그것이 이미 우주의 윤리 구조 안에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티베트 불교 스님이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난다. “그 모든 유대인들은 정말 끔찍한 업을 공유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티베트인들은 1950년 중국의 침공과 이어지는 참극을 당할 만한 어떤 끔찍한 짓을 했을까? 피해자를 탓하고 그들의 끔찍한 운명을 합리화하는 이런 종류의 미신을 더 이상 조용히 묵과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에는 이제 현대 불자들은 이런 사고를 벗어나야 하고, 그런 불의를 해결할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경험 이전에 마음이 있다. 마음이 경험을 이끌고 경험을 만들어간다.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면 고통이 뒤따를 것은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듯 뻔한 일이다.
붓다의 혁신을 이해하려면 윤리적 행동을 세 개 측면으로 분리하면 도움이 된다. 첫째 내가 추구하는 결과, 둘째 내가 따르는 도덕적 규칙이나 법규(예를 들면 불교의 계율이나 기독교의 십계이며, 여기엔 제례 절차도 포함된다), 셋째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의 마음 자세나 동기이다. 이런 측면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될 수는 없지만, 다른 것들보다 하나를 더 강조할 수는 있으며, 실은 우리가 보통 다 그리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지만 현대의 윤리철학 역시 삼대 이론이 있다. 공리주의 이론은 결과에 집중하고, 의무론적 이론은 십계 등의 일반 원리에 집중하고, 덕성 이론은 개인의 인격과 동기에 집중한다.
업을 영적 발전의 열쇠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지금 당장 우리 행동의 동기를 변용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가이다. 무아의 불교 가르침을 여기 적용할 때(현대 용어로는 개인의 자아의식이 정신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업은 자아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업은 자아의식(Sense of self) 자체를 말하며, 자아의식 자체는 개인의 의식적 선택에 따라 변화한다. 나는 내가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에 따라 나 자신을 재구성한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의식은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과 감정, 행동이 응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내가 먹은 음식으로 구성된 것처럼 나의 성격 역시 의식적 선택으로 구성된다. ‘나’는 나의 일관성 있고 반복된 마음 자세로 구성된다. 사람들이 ‘벌을 받거나’ ‘보상을 받는 것’은 그들이 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현재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때문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는 일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 저자 미상의 한 게송이 이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어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심어 운명을 거둔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심어야 할까? 불교는 고(불만족)의 원인으로 세 가지 건전치 못한 뿌리를 말한다: 바로 탐욕, 악의, 번뇌이다. 이런 문제성 있는 동기는 긍정적인 것으로, 즉 보시, 자애, 그리고 상호 의존성을 깨닫는 지혜로 각각 바뀌어야 한다.
업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몸이 죽은 후 다른 생을 꼭 말하지 않아도 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행복은 덕성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행복은 덕성 자체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우리를 벌한다.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마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세상에 다르게 반응할 때 세상 역시 우리에게 다르게 답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왜 그리하는지 알게 된다. 때로 사람들을 속일 순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행동 저변에 놓인 의도는 분명해지고 내 인격도 드러난다. 그렇게 나의 동기를 변용시키는 것은 내 삶을 변용시킬 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나라는 사람은 그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사실주의적인 업의 이해는 타자를 배제해야 함을 의미하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의 동기가 가져오는 결과에 관한 신비한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나의 동기를 변용시켜 내 삶을 새로이 하는 방법’으로서 업은 숙명적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이보다 더 힘을 주는 가르침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는 삶의 문제 상황을 수용하고 참으라는 의무를 부과받지 않았다. 오히려 업은 보시, 자애, 비이원적 지혜로 이런 상황을 해결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삶과 세속적 상황을 개선하라는 독려이다.
발췌, 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 이 글은 『트라이시클(tricycke)』 2008년 봄호에 실린 데이비드 로버트 로이의 글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데이비드 로버트 로이(1947~)
미국의 학자이자 저술가이며 일본 선불교의 일파인 삼보교단의 삼보 선을 수행하고 가르치는 불교 지도자이다. 파나마에서 태어난 그는 1971년 하와이에서 야마다 코운 로시와 로버트 에이트킨으로부터 선을 지도받기 시작했다. 불교와 사회 사이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강의와 워크숍 및 명상 지도를 하며 주로 불교와 현대 사회의 소통에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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