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어디에나 있다
의식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인간은 모든 의식을 가진
존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의식은 중력과 마찬가지로 만물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신경과학계가 제기했다. 이를 통해 불교와 신경과학이 공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고 있다.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는 “의식의 핵심은 의식이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뇌는 물질인데 어떻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비기독교 신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 의식에 대한 개념인 범심론(汎心論) 등의 고대 사상을 과학계는 대체로 지금까지 일축했다. 그런데 최근 불교가 일조하기도 했고, 또 특히 붓다가 설한 의식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범심론이 다시 한번 검토·적용되고 있다.
범심론에 따르면 의식은 어디에나 있다. 즉 의식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가 고통과 쾌락을 경험할 것이고, 아마도 우리 인간과 정확히 같은 방식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 고통을 겪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모든 의식을 가진 존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실은 이것이 붓다가 살생을 금한 첫 번째 계율을 통해 설한 가르침이고 이는 생명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학의 범주에는 양성자까지도 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의식’을 붓다가 가르친 의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가장 대중적인 현대 의식 이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줄리오 토노니(Giulio Tononi)를 비롯한 연구 과학자들은 코흐가 한때 ‘의식의 유일하고 유망한 근본 이론’이라고 불렀던 통합 정보 이론(IIT; Integrated Information Theory)을 도입했다.
토노니의 이론에 따르면 의식은 고도로 상호 연결된 다양한 정보를 가진 물리적 시스템에서 나타나고, 이 의식은 연구자들이 파이(phi)라고 부르는 이론적인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
토노니는 인간 두뇌의 파이(의식의 양)를 측정하는 검사를 창안했는데, 과정은 종을 울리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인간 두뇌에 자기 펄스를 보내고, 이 펄스가 앞뒤로 또 좌우로 뉴런을 통해 울려 퍼지는 모습을 관찰한다. 반향이 더 길고 선명할수록, 피험자의 의식의 양이 더 높다고 본다. 이 검사를 통해 코흐와 토노니는 환자가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마취 상태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의식을 측정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시급하고도 실질적인 요구가 이미 대두되어 있다. 의사·과학자들이 파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하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이 사실상 죽었는지, 치매 환자의 인식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태아의 의식이 언제 발달하는지, 동물의 지각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심지어 컴퓨터가 느낄 수 있는지 여부도 알 수 있다.
토노니의 가설을 컴퓨터에 적용하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기계가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인기 있는 TV 드라마, 〈스타트렉(Star Trek)〉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인 ‘데이터(Data)’와 같은 ‘누군가’를 상상해보라.[https://en.wikipedia.org/wiki/Data(스타트렉)] 그는 거의 인간처럼 행동하지만 인간보다 훨씬 체력과 인지 능력(컴퓨터와 유사)이 뛰어나다. 그러나 데이터에게는 인간과 같은 감정이 없다. 이로써 컴퓨터 ‘의식’이 인간 또는 ‘인지 의식’과 크게 차별화된다.
〈스타트렉〉(특히 ‘스타트렉: 차세대’ 시리즈)을 보면 팀원들이 데이터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안드로이드(휴머노이드 로봇 또는 합성 유기체)임에도 불구하고 데이터는 살아 있는 존재로 존중받고, 단지 (유머를 비롯한) 감정이 없고 순전히 논리적이라는 것만 다를 뿐 거의 인간으로 대접을 받는다. 실제로 많은 인간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리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어디에나 있는 의식’(‘보편적 의식’과 혼동하지 말 것)이라는 개념은 한층 더 흥미로워진다. 토노니의 이론에 따르면 파이값이 0보다 큰 물체는 모두 의식을 갖는다. 동물 외에도 식물, 세포, 박테리아, 심지어 양성자도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적 범주를 불교의 가르침과 혼동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과학자들(토노니, 코흐 및 추종자들)이 사용하는 ‘의식’을 붓다가 가르친 의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두 개념은 여러 면에서 중복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이는 불교가 우리의 더 넓은 삶과 관련성이 있다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일이다. (토노니는 분명 의식을 뇌의 기능으로 여겼지만, 불교 가르침은 결코 마음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의 마음관과 토노니의 개념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 가르침을 좀 더 신중하게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편의에 맞게 확장하거나 잘라내는 방식으로 수정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 개념은 아직 연구 중이거나 가설 수준(설령 이론적 수준이라도)에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불교를 잘 아는 불자들은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며,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희석하거나 수정하지 않고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개념을 확장해 우리는 생명과 생명체에게 존중을 표해야 한다
그러나 도겐이 『정법안장』에서 했던 말, 즉 ‘풀, 나무, 땅, 해, 달, 별 등의 만물이 다 유정(有情)이다’라는 개념은 더욱 흥미롭다. 그렇다고 해서 만물이 다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론자가 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려는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과학적 개념은 경전이나 논서에 담긴 이야기, 예를 들면 태양과 달을 신으로 간주하는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물질적 사물에 의식이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들을 기꺼이 ‘신격’이나 ‘천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더 탐구한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신격’이나 ‘천신’ 등과 같은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 이해의 도움을 받은 이러한 검토는 아마도 천신, 마귀, 비인(非人) 등을 언급하는 초기 불교 신화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들을 단순히 신화로 여기는 것이 안전하다. 즉 우리의 삶을 더 높은 의식으로 심지어 깨달음으로까지 인도해주는 내면의 인간적·신적 특성과 이런 특성이 가진 업과 영성 측면의 잠재력을 상징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신경과학자 코흐는 행복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의식이 다양한 수준으로 어디에나 있다는 불교 가르침에 접했을 때 나의 직관은 이 이론이 가져올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했다.” 코흐는 이어 말한다. “이제는 집에 벌레가 보여도 죽이지 않는다.”
의식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지구 전체로, 즉 어머니 대지로 확장하고 보면, 생명체에게 합당한 존중이 지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에 관련해서는 사실 붓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이미 존재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 마라(악의 화신)는 거대한 폭력적인 군대를 끌고 나타나서는 붓다에게 보리수 아래 앉을 자격이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우리도 인생에서 극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도달할 때 종종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과 같다). 붓다는 조용히 손을 뻗어 대지에 닿았고, 어머니 대지에게 자신이 보리수 아래 앉기까지 쌓아 가져온 모든 선업(善業)을 증명하라고 요청한다.
어머니 대지는 지구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하늘로 우뚝 솟아 아름다운 긴 머리채를 빙빙 돌리고, 머리채 끝에서 거대한 급류가 흘러내려와 마라와 그의 사악한 무리를 휩쓸어버린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에 직면한 순간 지구는 우리를 뒷받침해주는 선업을 상징한다. [붓다가 어머니 대지를 증명으로 부른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음 2개 문헌을 참조: J 1:71-75; Piya Tan, 부처님과 제자들(The Buddha and His Disciples), 싱가포르 2002, 2013: 2.21.]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탐구는 모든 생명체와 모든 존재가 어떻게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과 생명체에 존중심을 표해야 한다. 이렇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자(live and let live)”는 삶과 존재의 포용성 속에서 우리는 해탈의 진리와 고양된 아름다움을 지닌 더 높은 품격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즉 신과 천사처럼 살 뿐만 아니라 깨달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다.(의식에 관한 초기 불교 가르침에 대한 참조: Viññāṇa, SD 17.8a.)
번역 감수|로터스영어연구원
이 글은 『라이언스 로어(Lion-roar)』 2016년 4월 1일자에 실린 내용 [샘 리틀페어(Sam Littlefair)에 대한 응답으로, “선두 신경과학자들과 불교도들의 동의: 의식은 어디에나 있다”]를 발췌,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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