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찔레꽃
그림/글 이호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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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1, 94×57.5cm, 한지에 수묵 채색과 글씨, 2010년 |
꽃을 화폭에 심는 마음으로 그린 찔레꽃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한강의 『흰』 중에서)
‘하얗게 웃는다’를 읽으며 문득 떠오르는 꽃이 찔레꽃이다. 산청 차황면 ‘찔레꽃 뚝방길’에는 장사익의 <찔레꽃> 노래비가 서 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이 까닭에 해마다 장 선생의 무료 공연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따사로운 봄날 중턱에 한낮의 별처럼 무리 지어 핀 찔레꽃은 잉잉대는 벌들의 천국이다. 나 또한 별처럼 아득하고 쓸쓸한 찔레꽃을 그리며 한순간만이라도 깨끗하게 부서지고 싶은 마음이 인다. 지난 찔레꽃의 사연과 함께.
수년 전 ‘지리산 진경순례’ 전시(2013년, 서울 아라아트센터 전관)를 열었을 때다. 아래층 전시 공간에서 귀에 익은 ‘찔레꽃’ 노래가 들리기로 사람들이 몰려 있고 장 선생이 작품 앞에서 열창하고 있지 않는가. 박수가 끝난 후 인사 나누자 작품 감상에 대한 음성공양(音聲供養)이란다. 순간 정현종의 시 「방문객」처럼 와락 한 사람의 일생이 다가왔고 여전히 오고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오롯이 찔레꽃 노래 인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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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 181×274cm, 한지에 수묵과 채색, 2023년 |
가수가 나를 위해 불러준 사연과 달리 내가 가족을 위해 붓을 든 일도 있다. 임신 중인 며느리와 태어날 손주(2023년 5월 말경)를 떠올리며 두 달간 찔레꽃(200호, 181×274cm)을 그렸다. 순산을 바라는 시아비의 심정으로. 내심 장미꽃 백 송이 대신 찔레꽃을 선물하고 싶어서.
매일 아침 산책 때 둑길 길섶에서 본 찔레꽃 덩굴을 마음에 품고 화실에 돌아와 밑그림 없이 그렸다. 마치 꽃을 화폭에 심는 마음으로. 그 간절함이 닿았는가. 그림에 낙관한 다음 날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이후 졸작은 ‘2024년 찾아가는 경남도립미술관(산청군 전시장)’에 출품했다. 찔레꽃 사연에 관객들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꽃피는 아몬드 나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반 고흐가 그의 조카(빈센트 빌럼) 출생을 기념해 동생의 아내에게 선물한 사연을 비견하며.
실제로 작품의 소재는 작가가 처한 당시의 환경과 감흥으로 붓을 드는 일이 흔하다. 낯부끄러운 일일지언정 돌아보면 <찔레꽃>은 손자와 함께 태어난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의미 깊은 추억과 함께. 하여 찔레꽃을 만날 때마다 마음은 부서진 뭇별처럼 마냥 아득해져 온다. 그리고 조용히 부르는 노래 “당신은 찔레꽃~~”
이호신|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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