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三學)
-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훈련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삼학(三學)이란 무엇인가
붓다는 중도(中道)의 실천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지도하셨다. 그리고 팔정도는 삼학(三學, ti-sikkhā) 안에 포함된다. 삼학은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훈련을 의미한다. 이들 세 가지는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이라고 부르며 ‘계의 모음’, ‘정의 모음’, ‘혜의 모음’을 의미한다. 마치 한 그루의 과실수가 뿌리, 줄기, 열매로 구성된 것처럼 계학은 뿌리, 정학은 줄기, 혜학은 열매에 비유할 수 있다.
먼저 계학은 도덕성을 키우는 훈련을 의미하며 팔정도의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삶)’을 포함한다. 두 번째인 정학은 집중하는 마음을 의미하고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을 포함한다. 정학은 우리에게 사정근(四正勤), 사념처(四念處), 사선정(四禪定) 등의 명상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 번째인 혜학은 지혜의 훈련이며, ‘바른 이해’, ‘바른 사유’를 포함한다.
삼학은 우리의 일상에서 다루고 확인할 수도 있다
붓다가 첫 번째 설법(初轉法輪)을 통해서 강조했던 ‘중도’는 ‘팔정도’를 의미하고, 팔정도는 다시 ‘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팔정도 여덟 가지가 복잡하고 어렵다면, 계정혜 삼학을 이해해도 좋다. 이렇게 팔정도, 삼학, 한자로, 법수(法數)로 이야기하면 불교의 가르침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나와는 거리가 먼, 일반인이 아닌 학자, 도인이나 성인이 가야 할 길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학은 우리의 일상에서 다루고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마음은 신이 난다. 룰루 랄라~ 한번 상상해보자.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아니 저 인간을 여기서 보다니…’ 즐거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분노의 마음이 일어난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저 사람과의 과거, 현재, 미래의 악연을 떠올리게 된다.
이 순간, 저 싫어하는 사람을 향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편할까? 아니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이 편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운이 나쁘다 하며 못 본 척 지나가려 할 것이다. ‘너 잘 만났다’ 하며 욕을 하고 때리면 속이 시원할지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발생할 일들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는 화가 나도 속으로 참고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을 도덕성, 계학이라고 부른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화나는 대로 표현했다면 이 세상은 전쟁으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삼학 중에 첫 번째인 계학을 가지고 있다.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가고 있는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난 순간이다. 우리는 화가 난다. 분노한다.
여기서 질문을 하겠다. 만약 이 순간 우리가 도덕성을 잘 지키면 화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계학의 실천이 우리의 분노를 조절하게 해줄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혹시 법을 잘 지키면 화가 안 날까? 그래도 화가 난다. 때로는 더 날 수도 있다. 계학은 화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 계는 언행으로의 표출을 다스리는 역할이지, 튀어나온 마음을 다루지는 못한다. 계학은 좋은 훈련법이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럼 화난 마음은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바로 정학이다. 정학은 집중으로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을 포함하고 있다. 화난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이 개입해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정학을 마음공부, 명상, 집중 훈련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럼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가고 있는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난 순간이다. 우리는 화가 난다. 분노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앞서 즐거웠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이런 분노와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토록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아마도 기억 속에 숨어 있던 것 같다. 싫어하는 그 사람의 모습, 음성, 소식만 들어도 숨어 있던 미워하는 마음이 바로 튀어나온다. 이 분노는 내 안에 기억 속에서 조건만 맞으면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만약 우리가 정학, 명상, 집중 훈련을 열심히 잘하면, 이렇게 숨어 있는 기억도 다스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불가능하다. 정학은 튀어나온 대상을 다스리는 역할이지, 숨어 있는 마음을 다루지 못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디로 마음을 보내겠는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보겠나. 정학은 좋은 훈련법이지만 한계가 있다. 그럼 숨어 있는 마음은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바로 혜학이다. 혜학이 숨어 있는 마음을 추적해 제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하는 조건을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돕는다.
계정혜 삼학은 한 그루의 과실수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삼학은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작용한다. 수행처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팔정도와 삼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붓다가 제안한 중도의 실천법인 팔정도, 그리고 팔정도를 포함하는 계정혜의 삼학은 지금 이 순간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연습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정준영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 전공 교수로 있으면서 대원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 다른 명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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