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이 시작된 인도 마투라
- 붓다의 본질을 드러내다
초기 마투라 불상이 간다라의 영향(두터운 옷주름)을 받던 시기의 마투라 불상 |
인도 세 종교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마투라
아그라에서 북서쪽 58km를 달려 마투라(Mathura)에 도착하니, 시내 외곽에 버스를 주차하고 오토 릭샤를 타고 마투라 박물관으로 가야 했다. 마투라 시내는 대형 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도시의 골목들이 좁고 복잡한 것은 마투라도 예외가 아니다.
마투라 최초기 불상 |
마투라는 총면적 3,709km2, 인구 44만 1,894명(2011년)으로, 수도 델리에서 동남쪽 145km의 야무나강 서안에 있다.
마투라는 육상교통의 요충지이다. 북쪽으로 간다라, 동쪽으로 갠지스 평원, 서쪽으로 서부 해안, 남쪽으로 비디샤, 산치와 이어진다. 고대 16국 중 야바다족의 수라세나국 수도이며, 쿠샨 왕조의 겨울 수도였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다.
종교적으로는 인도의 세 종교의 중심지이다. 힌두교는 크리슈나의 탄생지이며, 자이나교는 경전 결집지이자 분파 생성지이다.
불교는 붓다의 마투라 방문이 『앙굿따라 니까야』, 설일체유부의 율장인 『십송률』, 『아육왕전』 등에 전한다. 붓다의 제자인 레바타, 대가섭의 부인 바드라 카필라니, 아라한의 경지에 의문을 제기한 마하데바(대천), 아소카왕과 함께 불적을 참배한 우파굽타 등이 마투라 출신이다. 가전연 존자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초기 경전에 의하면, 마투라는 인구가 많고 부유하지만 길이 평탄치 않고, 먼지가 많으며, 사나운 개와 야차가 있어서 탁발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마우리아왕조 이후 여러 부파가 정착한다. 특히 설일체유부의 중심지가 된다. 이 부파는 얼마 후 북서인도의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으로 진출해 거기서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왕의 지원으로 크게 발전한다. 한편 마투라에 남은 유부는 근본유부라 불리고, 그들의 율장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를 마투라에서 만든 듯하다.
간다라 물병을 든 미륵보살 |
무불상 시대를 지나 마투라와 간다라에서 동시에 불상 출현
법현 스님의 『불국기』에 의하면, 마투라의 야무나강 좌우에 20개의 가람이 있고, 승려가 3,000명이다. 불교가 매우 성했으며, 국왕이 불법을 열심히 믿고 예를 갖춰 승려를 대하고 공양했으며, 승려들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고고학 발굴 결과, 마투라에는 쿠샨과 굽타 시대의 사원지가 40여 곳 확인되고, 불교 조각은 파편을 포함해 1만 점에 이른다.
마투라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C.E. 1세기경 불상이 처음 조성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최상의 존재이며 이미 완전한 열반의 경지로 사라져버린 붓다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像)을 만드는 것은 원칙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과제이다. 어떻게 인간의 사유를 초월한 존재를 다시 유한한 현상계, 생사윤회의 세계로 끌어내리지 않고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숫타니파타』도 “영원히 잠든 붓다는 어느 것에도 필적할 수 없다. 어떤 관념으로도 그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 그와 관련짓는 어떤 관념도 허망하다. 그에 관해서는 어떤 언어 표현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붓다의 표현은 베다 시대 신을 상징물로 숭배했던 브라만교 관습을 계승해, 보리수·법륜·불족적·금강좌·탑 등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를 무불상 시대라 한다.
그러나 상징 숭배 역시 숭배이다. 스승에 대한 경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되어갔다. 상징은 상(像)으로, 추상에 의존한 금욕적 절제는 인간 형상의 감각적 재현으로, 이상적 인간에 대한 경의는 초인적 자비의 힘에 대한 숭배로 옮겨갔다. 이 새로운 감정은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의식 행위가 영험 있기를 바라는 간구(懇求)의 표현이었다.
불상 구현은 간절한 신앙심의 지원을 받았지만 그 시작은 쉽지 않았다. 간다라에서는 초기에 불전(佛傳) 부조의 한 부분으로 불상을 조성했고, 마투라에서도 처음에는 보살상이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짧은 중간 과정을 거쳐 1세기경 쿠샨 왕조가 성립할 무렵, 드디어 불상이 마투라와 간다라에서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 그러나 그 풍은 매우 다른 것이었다. 간다라 초기 불상이 그리스 헬레니즘을 계승한 것이면, 마투라의 초기 불상은 인도 고유 전통을 계승했다. 헬레니즘이 이상화된 사실적 기법을 썼다면, 인도 고유 전통은 내적 생명 에너지를 중시하고, 육감적 매력을 과장했다. 이 점은 약시상들에 더욱 잘 나타난다.
간다라의 재료가 회색, 회흑색, 회청색의 편암(片岩)이라면, 마투라는 흰색, 크림색의 점이 있는 적색 사암이다. 간다라는 편암의 결대로 층층이 쪼개지는 성질 때문에 상의 크기가 작고, 깊이가 제한되어 부조에 가까운 경우가 많고, 손 등은 따로 만들어 붙였다. 마투라는 재료 크기에 제한이 없었다.
간다라의 모델이 헬레니즘 시대 신상(神像) 내지 로마 황제상이면, 마투라는 마우리아 시대 약샤상(B.C.E. 2C)의 육중하고 생명감 넘치는 모습이다. 간다라가 32상에 덜 구애받았다면, 마투라는 32상 등 인도 전통의 성인상을 구현하려 했다.
간다라와 마투라가 붓다의 본질을 내재화하려 한 것은 동일하다. 간다라는 죽은 이의 영혼이 머무는 파르티아의 사자 초상 관념을 수용해, 상에 마치 어떤 사람이 실재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마투라는 계승한 전통 자체가 격동적이며 따스하고 강렬한 내적 생명력의 분출을 보여준다. 마투라 최초기 보살 좌상은 구제를 열망하는 세계를 향해 이제 막 설법하려는 깨달은 자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굽타 양식의 불상 |
굽타 마투라 양식으로 인도 고전 예술의 극점에 도달
이 두 양식은 곧 두 지역 간의 긴밀한 교류로 통합·승화된다. 마투라 불상에 간다라의 두꺼운 옷 주름이나 콧수염 등이 등장하게 된다. 굽타 시대로 오면서 마투라는 이러한 형태상의 수용에 그치지 않고, 간다라의 고결한 이상주의와 초월적 내향적 태도마저 흡수하고, 아마라바티의 부드럽고 생동하는 조각 전통까지 수용해 세계 조각 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체 표현이라는 굽타 마투라 양식을 이루어낸다.
화려한 광배를 뒤로하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나란한 옷 주름 곡선의 투박의(透薄衣)가 온몸에 들러붙으면서 드러나는 균형 잡힌 팔등신의 장대한 신체와 선정에 잠긴 표정에서 우러나는 고요함과 청년의 얼굴이 주는 건전미는 싱그러운 연둣빛 신록 같다. 더욱이 대통령궁에 소장된 불입상은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마저 풍기면서 보는 것만으로 번뇌를 벗어나 불세계 속으로 끌어당긴다. 붓다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이라는 실현될 수 없는 과제를 거의 실현한 것이다.
인도 고전 예술의 극점에 도달한 굽타 마투라 양식이 보여준 관능성과 정신성의 완벽한 균형은 전 세계 불상의 표준을 제공했고, 특히 항마촉지인상의 전래를 통해 경주 석굴암에까지 연결되었다.
글과 사진|각전 스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39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해양수산부에 근무하다가 궁극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출가했다. 현재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저서에 『인도 네팔 순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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