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목표가 무엇인가? | 성철 스님의 명법문

성철 스님 법문

불교의 궁극 목표

성철 스님(1912~1993)

‘살아가는 목표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행복에 있다’고 한다
불교의 궁극 목표는 무엇인가? 『기신론(起信論)』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리고 최후의 낙(樂), 즉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곧 상대 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 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 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 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을 가려면 서울 가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입니다.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습니다.

천지만물에는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으며 무생물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은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느냐는 것을 한번 생각해볼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자나 어느 학자 누구든지 간에 분명히 ‘살아가는 목표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행복에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 표현
사람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 고생을 하게 되는 많은 조건이 있습니다.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고, 사생이 고해이다[三界火宅四生苦海]”라고 표현합니다. 삼계(三界), 즉 중생이 사는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고, 사생(四生), 즉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통의 바다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절대 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예수교의 천당설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 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과 모순이 대립하는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곧바로 끝이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를 공상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 없으니 절대 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구르고 재주를 넘어도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을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곳만이 절대 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새로운 땅이 있으며,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늘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한번 들어가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예수교의 근본교리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절대적인 믿음에 기반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고 하면 현실 세계를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지배해왔는데, 불교는 3,000년, 예수교는 2,000년, 바라문교는 4,000여 년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 없이 믿고 따랐는데, 지혜가 차차로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와 불합리(不合理)를 따지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처럼 예수교는 그 근본이 어디에 서 있느냐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절대적인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 와서는 하늘나라를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또 여러 신학사상들이 나와서 예수교의 사상 자체도 전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 교리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빼고는 예수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서만 절대 무한의 세계인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교는 상대 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 무한의 세계를 자기의 마음속에서 찾아
그러나 불교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상대 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 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속에서 찾습니다. 절대 무한의 세계가 내 마음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 내 마음과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경우에는 타력적인 방편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알려면 자기에게 이와 같은 절대 무한의 세계가 갖춰져 있고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계발해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서 자기에게 있는 절대 무한의 능력을 계발해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계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으로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큰 보배 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력 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의지(意地)를 문득 벗어나 마음 근원을 깨달으면
신령한 빛이 무너지지 않는 몸을 길이 비추리라.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長照不壞身하리라

이렇게 내 마음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계발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自利利他]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게송으로 만들어본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고 그대로 우리가 계발하면 원자탄·수소탄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무한한 보배 창고를 계발해서 끝없는 우리의 능력을 이용하면, 결국 자기도 이익을 보는 동시에 남에게도 이익을 주게 됩니다.

● 이 법문은 『성철 스님 백일 법문-상』(퇴옹 성철 저, 도서출판 장경각 刊, 2021)에서 발췌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