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과 편견, 다양성의 관계
행복은 불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찾아온다. 부실한 땅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면 나무는 쉽게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유기체가 있어야 하며, 나무뿌리가 닿을 수 있는 땅속 관계망이 있어야 한다. 나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숲이 울창한 이 유는 공생하는 존재가 다양하게 숲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관계망도 필요하지만, 자연과의 조화 로 세상을 자비롭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우리는 조금만 노력한다면 쉽게 자연을 접할 수 있는데도 매일 벽과 벽을 보며 살아가 는 존재가 되고 있다. 자연과 연결된 이 경이로운 관계망을 회복한다면 미래가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가끔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우리 가족은 매우 분주해진다. 아이들은 새로운 손님 맞을 준비로 얼마나 신나는지, 도착 일주일 전부터 미지의 손님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놓고 기다린다. 그런데 선물이라 해봤자 이 시골에서 무엇 대단한 것이 있으랴!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다든 지, 들판에서 한창 아름다운 야생 꽃다발을 만든다든지, 어디선가 따온 열매를 고이 모셔와 선 물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마련한 선물은 도시에서 파는 여느 선물 못지않게 훌륭하 다. 누군가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이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가끔 이런 진심의 가치보다는 편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고, 불쌍해라. 시골에서 가지고 놀 게 없으니 이런 걸 가지고 놀지.”
누군가는 아이들의 진심을 먼저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진심보다 자신이 가진 편견으로 주 위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한번은 친정어머니 같은 분이 손을 꼭 잡고 무척 슬프고 안타까운 눈 으로 나를 위로했다.
“아이고, 이런 오지에서 어떻게 살아? 뭐가 좋아서 여기서 살겠다는 거야?”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위로해주셨는데, 사실 나는 위로보다 더 큰 안타까움 을 느꼈다. 그분은 척박하고 인적 드문 해발 1,200m의 환경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보였 으니 얼마나 슬펐을까. 같은 한국인 여성이 외국 시골에서 외떨어져 사는 그 사실이 괴로우셨으 리라. 이분의 위로가 사실 이해가 되면서도 편견으로 당신이 괴롭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미안하 고 민망했다. 나에게는 이곳에서의 삶이 내 생애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인데도 말이다. 나 의 의지대로 삶과 자연, 생태계에서 공존하는 그 세월을 만들어나가는 삶이 얼마나 창의적인가! 오히려 스스로 자부심이 느껴져 나를 보며 슬퍼하는 이분을 위로해줄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세상의 눈은 그렇게 조금씩 달랐다.
“아이고, 전자레인지도 없어요?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요?”
“아이들이 많은 집 안에서 식기세척기도 없이 매번 설거지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인터넷도 느린 곳에서 정말 울화통 치밀어 저는 못 살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이들이 편리한 물건이 없어 인생이 불행하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편리한 물건 이 없어 다른 경로로 불편을 해결하는 그 즐거운 과정은 모르고 있다. 전자레인지는 없지만, 장 작 난로에 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는 즐거움이 있고, 식기세척기는 없지만, 아이 셋이 엄마 를 돕겠다며 고사리손으로 설거지를 해주는 그 감동도 모를 것이다. 인터넷이 느리지만, 그 인 터넷을 찾아 이웃 마을로 마실 나갈 여유도 있으니 확실히 불편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게 된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자연에서는 진행되는 그 느린 성장의 변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삶은 불편한 대로 경로를 우회해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할 시간이라도 있지만, 편리한 삶은 하나가 없으면 바로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게 된다. 편리가 무너지면 불행이 시작되고, 처 음부터 불편한 사람은 그 불편한 가치를 다른 이보다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 고단수가 되어간다.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편견을 갖게 되고, 내 편리와 물건을 해치는 것을 경계하며 두려워 한다. 자신과 조금 다른 삶을 산다고 다른 이를 편견의 눈으로 보는데, 다양성은 세상의 모든 존재 이유이다. 마치 생태계의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고자 한다.
숲은 모든 생명체의 공생 장소다. 나무뿌리에 공생하는 균류는 미네랄을 흡수해 나무에 전 달하고,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해 균이 필요한 물질을 전달한다. 사슴은 숲에서 나고 자라며 보호처를 마련하고, 두더지는 풀을 먹으며 숲 바닥을 청소하기도 한다. 새는 나무에 기생하는 곤충을 잡아먹으며, 때로는 숲의 열매를 다른 곳에 전파하는 씨 은행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게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연결 체계가 숲속에 존재하고, 자연에 존재하며 우리 주위에 존 재한다. 눈을 돌려 아파트 화단의 세상만 보더라도 그 안에 수많은 개체의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어쩌다가 천편일률적인 세상에 사는 우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그 관계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살 때다. 생긴 모습이 다르다고 꺼리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또 멀리하며,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비난하는 그런 시대를 고집한다면 온난화만큼이나 어려운 미래를 초래 할지도 모른다. 내 시야를 넓히기 위해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인지상정의 자세로 세상 을 바라봐야 변하지 않을까?
시골 생활이 불편하다고 슬퍼하고, 그 불편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삶은 진정한 자연 친화적 인 삶이 아니라고 본다. 불편하면 좀 더 적극적으로 그 불편을 해결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행복은 단순하게도 이런 불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찾아온다는 걸 시골 생활을 하면서 절실히 느낀다. 마치 불편이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오늘도 오븐에서 구수하고도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갓 구운 빵을 꺼내며 소소한 행복에 젖는 다. 제과점에서 사 오는 빵과는 다른 그 기쁨을 누군가는 알 것이다! 재료를 사고, 발효종을 넣 고, 반죽하고 기다리는 그 시간. 내가 관여하지 않는 그 시간에도 자연은 성장하고, 반죽은 발 효되어 부풀어 오른다. 빵은 도깨비방망이로 뚝딱해서 내 식탁에 오르는 게 아니라, 긴 시간 오 븐에서 완성되어 나오는 그 기다림이 있다. 기다린 끝에 얻은 결실, 그 과정을 생생히 느끼고 난 후에야 제과점이 없어 불편했던 이 현실이 행복으로 변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엄마! 빵이 맛있어!”
아이들이 환호하며 고사리손으로 빵을 뜯어 먹는다. 행복이란 다른 게 없다. 이런 소소함에 서 찾아온다. 오늘도 인적 드문 이곳에 우리 다섯 가족의 오붓한 보금자리가 있어 감사하고, 자연이 주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며, 세상을 좀 더 자비로운 눈으로 볼 수 있어 행복하다. 선 한 행복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님께 퍼지기를 간절히 바라보며, 자연의 일부로서 함께 노력 해보자고 응원하고 싶다.
김산들
스페인에서 언어와 도자기를 공부했다. 여러 방송 매체에 스페인 정보를 제공, KBS 다큐 <공감>, <인간극장>, EBS 세계견문록 <스페인 맛에 빠지다>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다룬 『우리 가족, 숲에서 살기로 했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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