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 속에서 되찾는 참다운 자유 | B에게 보내는 여섯 편지

자유인의 길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친애하는 B에게 :
하기는 쉽지만 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지 않고 있소? 그대는 무언가 하는 사람이오, 아니면 무언가 하지 않는 사람이오? 무엇을 하기가 어렵겠소,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어렵겠소?

B에게 이를 묻는 것은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무언가 하기 마련이라서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을 더 좋게, 더 높게, 더 깊게 보는 무위(無爲)의 사유를 되새김질해야 하기 때문이오. 하기는 쉽지만 하지 않기는 어렵소. 아니, 하기는 어렵지만 하지 않기는 더 어렵소. 이를테면, 남에게 일을 시키기는 쉽지만 남에게 일을 시키지 않기는 어렵소. 나도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면 온몸이 들썩이며 힘들어지오.

불가에서 도가의 무위의 개념을 받아들여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도 같은 이치요. 허공무위, 열반무위, 진여무위처럼 생멸 또는 생주멸(生住滅)을 거치지 않는 최상의 단계에 무위라는 말을 붙이오. 아무것도 조작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오. 주자와 같은 유가가 무조작(無造作)의 리(理)를 내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오. 꾸미는 것보다는 꾸미지 않는 것이 더욱 아름답듯이, 아니, 꾸미지 않는 듯 꾸미는 것이 가장 어렵듯이, 무위는 이렇게 많은 의미를 담소.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한다(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것이요.

『장자』에서 소요는 놀 유(遊)와 같은 뜻으로 말 그대로 논다는 의미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어떤 상태이고 어떻게 운영해야 무위요? 노자가 이에 대해 대답하고 있지 않을 때 그를 이은 장자는 나름대로 대답을 하오. 그것이 바로 소요(逍遙)라오.

『장자』에서 소요는 놀 유(遊)와 같은 뜻으로 말 그대로 논다는 뜻이오. 놀 유에 책받침이 있는 것은 ‘놀러 간다’는 의미를 담기 때문인데, 소요에도 책받침이 있어 모두 ‘어딘가 가는데 일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람 쐬러 감’을 가리키오. 노는 데 목적이 있으면 그것은 일이 되기 쉽소. 그래서 목적이나 이익 또는 유용성이나 이해관계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이오. 예술도 그렇지 않소. 돈을 벌려고, 이름을 날리려고, 나라를 세우려고 예술을 시작하지는 않지 않소?

소요는 현대어로 바꾸면 산책(散策)이나 산보(散步)와 같소. 산책은 지팡이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것이고, 산보도 걸음을 이쪽저쪽 옮기는 것이니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소. 우리의 삶이 이런 걸음걸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오. 놀며 쉬며, 이야기하며 웃으며 가야 한다는 것이오.

무위를 통해 소요하듯, 스님은 무소유를 통해 운수행각한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과 같소. 왜 중이 될 것 같소? 스님이야말로 정말로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라오. 자유를 얻겠다는 욕심 말이요. 욕심이 아니라면 욕망, 욕망이 아니라면 의지라고 하지요. ‘원(願)을 세운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소? 영원한 대자유에 대한 발원, 기원, 소원이지요.

절간이 추구하는 무소유도 마찬가지요. 뭐가 있으면 어떻게 떠나겠소? 눈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것이라도 일단 가지면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사람이고 그의 습성이오. 뿌리가 끊어지고 있는데도 거기서 떨어지는 달콤한 몇 방울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사람임을 불교는 잘 그려내고 있소. 칼날 끝의 달콤한 꿀이라고! 우리는 시간 앞에서 ‘말라가는 샘 속의 물고기’(『출요경』 제2권)에 불과하다오. 그래서 갖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갖는 것이오. 그래서 규율 속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오. 그래서 스님들은 떠돌아다니는 것이오.

자유자재하는 스님의 소요 또는 소요유를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 하지요. 구름과 물처럼 멈춰 있지 않고 늘 흘러간다는 것이오. 무위를 통해 소요하듯, 스님은 무소유를 통해 운수행각을 하오. 그 모두 자유인의 길이오.

『장자』의 「소요유」에 대한 불교의 견해
그럼에도 『장자』의 「소요유」에 대해서는 불교의 분명한 견해가 있소. 우리가 보고 있는 『장자』는 위진 시대의 곽상(郭象)이라는 이가 편집하고 주를 단 것인데, 문제가 참으로 많은 해석을 붙였소. 하다못해 곽상이 누구의 것을 훔쳐 자기의 주라고 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이 있을 정도이고, 게다가 훔쳤으면 제대로나 옮길 것이지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뜬금없이 많이 집어넣어 문맥이 이상하고 장자의 뜻과 같지 않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곽상의 주가 틀렸다(郭注, 誤)’고 적고 있소.

거기에 비슷한 시기에 지둔(支遁) 스님-그는 전에 말한 적 있는 무위의 호흡법인 『안반경』에 주해를 달기도 했소-도 한마디를 붙이오. 곽상은 모든 것이 운명이라며 내가 도를 닦고 네가 도를 못 닦는 것도 다 본성으로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지둔은 말도 안 된다며 개인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을 강조하오. 만일 모든 것이 본성에 따른다고 주장한다면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도 불필요하게 되고 말기 때문이오. 불교가 추구하는 것이 도를 닦는 것, 부처가 되는 것, 성불하는 것인데 거기에 수행이 없다면 불교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는 소요를 통해 ‘깨우친 마음 밝히기(명심明心)’와 ‘바라는 바를 해주기(천정天正)’를 주장한다오.

그래서 함부로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오. 내가 그대를 때려놓고도 이 모두 부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 그대는 받아들이겠소? 아닐 것이오. 그때는 저항하고 반박하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이 비폭력적인 한에서 말이오.

노자, 장자 할 것 없이 모두 수양론을 강조하는 까닭
무위를 말하는 노자나 소요를 내세우는 장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수양론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소. 비록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남을 어쩌려고 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오. 그런 수양을 가장 규범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다름 아닌 불교요. 현대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은 지나치고 어떨 때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지만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그 엄격한 계(戒)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소. 계율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오. 그것이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이고 이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오.

계율 속에서 되찾는 참다운 자유, 어떻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이리저리 노니면서 얻는 자유, 어떻소? 장자는 우리의 삶을 꼭두각시로 보았고 그 끈을 풀어내는 것을 ‘현해(懸解)’라고 불렀소. 불교의 ‘해탈(解脫)’과 비슷하지요? 우리의 삶이 어떤 것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소? 그래서 우리는 ‘소요산 소요사’와 같은 절을 찾아 잠깐이라도 사지에 매인 끈을 풀어보는 것이 아니오?

B여,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 ‘세상에 고삐 꼬인 삶(세지소기世之所羇)’이라오. 그 큰 덩치의 소가 코에 고삐 하나 꿰었다고 꼼짝 못 하고 말을 듣는 모습이 나의 신세와 닮았기 때문이오. 쇠뿔은 어디다 쓰려고 달고 다니는지.

B여, 해탈이라는 말 그대로 풀고 벗어나보고 싶지 않소? 그리하여 맘껏 자유를 느껴보고 싶지 않소? 고삐 풀린 망아지라도 말이오.

정세근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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