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작은 결심이
불러온 변화
매일 아침, 마을 아이들은 유리병에 샘물을 받아 학교에 간다. 하늘, 구름, 바람, 숲, 대지를 품은 샘물이 아이들 식탁에 오를 때면, 이 아이들이 물을 막 머금고 피어나는 새싹처럼 보인다. 푸른 잎을 펼치며 무럭무럭 자라날 미래의 나무들. 이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더 푸른 세상이 되도록 어른이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길을 열어줘야 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인생의 최고 가치가 무엇인지 옆에서 유심히 안내해주는 어른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는 게 최고였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집과 차를 장만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어른이 되어도 나는 항상 불안했다.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없어 항상 결정 장애를 겪는 듯했고, 어떤 일에 대해 주류에 휩쓸려가는 일도 많았다. ‘남들이 다들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해야지’라고 하면서….
지금 어른이 된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소심한 자신을 움직이지 못해 주류에 맡기는 일. 아주 소소한 일에서도 말이다. 가령 대량생산 가공된 육류가 나쁘다고 하면서도 마트에서 생각 없이 소시지나 닭고기를 산다. 가축우리에서 학대받으며 지낸 동물이 불쌍하다고 하면서도 저 자신은 그런 고기를 사 먹는다. ‘뭐 남들이 다 사 먹는데 나라고 사 먹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 위안을 한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우리는 안일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무관심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 요즘 세계적인 추세가 플라스틱 재질의 물병과 빨대, 비닐봉지 사용 등을 금지하는 분위기이다. 기업에서는 플라스틱 포장지를 대체하고, 자연 친화적인 포장지를 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뜻있는 소비자와 함께 환경오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이(사회, 기업, 개인)가 경각심을 갖고 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심각한 얼굴로 돌아온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학교 급식 때 아이들마다 작은 플라스틱 물병이 지급돼요. 친구들은 그 물병의 물을 마셔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다. 플라스틱 물병이 지급되는 게 왜 나쁘지? 나는 아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변명이라도 하듯 급식에 대해 아이에게 이런 말로 대답해주었다.
“아마도 각자의 위생을 생각해서 개봉하지 않은 물병을 지급하는 게 아닐까?”
아이는 미심쩍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 학교에서는 플라스틱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고 가르치잖아요? 그런데 왜 플라스틱에 담긴 물을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지금 지구의 바다에는 큰 플라스틱 섬이 바다 생물과 생태계를 어지럽힌다고 하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저는학교에서 지급하는 물병을 받을 수가 없어요.”
아이의 신념이 얼마나 당찬지 나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번쩍 깨어났다. 맞다!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플라스틱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배움을 주는 학교에서 먼저 이 플라스틱 물병을 지급하는 일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아이가 말하는 요점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환경호르몬인 플라스틱 미세 입자는 우리 몸에 얼마나 나쁜가! 위생을 생각한다고 플라스틱 물병을 지급하고, 플라스틱을 재생산해내는 아이러니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 나는 학교 식당에서 주는 플라스틱 물병을 받지 않을 거예요!”
아이가 거부하며 말하자 나는 대책을 물었다.
“그래? 그러면 넌 어떻게 물을 해결할 거니?”
아이는 자신의 신념에 굴하지 않고 해결책까지 나에게 제시했다.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마을에 샘이 두 군데 있잖아요. 우리 집 근처에도 샘이 두 군데 있고! 저는 샘에서 물을 받아서 마실 거예요. 제가 가지고 다니는 물병에 매일 물을 담아 학교에 가져갈 거예요.”
아이의 확고한 신념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했는지 모른다. 자연에서 관찰하며 놀며 학습하는 일이 그냥 노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의식이 은연중에 스며들었나 보다. 아이라고 신념이 없는 게 아니었고, 아이라고 그냥 뒷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그러나 논리적으로 보여준 아이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주류에 휩쓸려 침묵하는 일을 경계하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일! 비록 세상 변화에 미미할지라도 자기 생각이 옳다 싶을 때 바로 실천하는 용기, 참 큰 배움이다.
아이의 작은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 후 학교 식단에는 변화가 생겼다. 소소한 행동이 큰 나비효과를 불러와 학교에서는 더 이상 플라스틱 물병을 아이들에게 나눠 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매일 마실 물을 샘에서 직접 길러온다. 그날그날 깨끗한 샘물을 마시는 아이들이 얼마나 무럭무럭 자랄지…! 마치, 물을 머금은 새싹 같다.
언제나 작은 씨가 싹을 틔우듯 그렇게, 자기 의지도 확고히 튀어나오는 아이들이다. 그래서 어른이 면박을 주거나 밟으면 안 된다. 귀 기울이고 의견을 들어주며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고 지도해주는 일이 참 중요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삶의 태도나 깨달음, 자연이 주는 경고나 평화, 동물을 관찰하며 느끼는 소소한 행동, 생활 정보나 지식 쌓기 등 미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에 눈을 돌리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 배우지 못했다고 어른이 되어서도 배울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사실은 언제든 배울 수 있는 매 순간의 기회가 가까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려고 한다.
요즘, 한국 사회가 좋아져 많은 이들이 좋은 위치에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살고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쾌락과 편리함 위주로 생활하기에 불편하다 싶으면 신경써야 할 문제에 대해선 외면하기 일쑤다. 말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눈을 감고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아이의 작은 행동에 공감하며 자연, 사회, 국가, 이웃 등을 위해 소소한 실천 하나씩 해보는 것은 어떨까? 개인 한 명 한 명이 모으는 그 작은 에너지가 어쩌면 큰 나비효과로 우리네 삶에 긍정적 변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싶다.
김산들
스페인에서 언어와 도자기를 공부했다. 여러 방송 매체에 스페인 정보를 제공, KBS 다큐 <공감>, <인간극장>, EBS 세계견문록 <스페인 맛에 빠지다>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다룬 『우리 가족, 숲에서 살기로 했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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