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도는 끝내 이루어진다
기도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성태용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가피가 있을까 봐 기도 않는다”는 말의 의미
“당첨될까 무서워 복권 안 산다”는 분이 있었다. 복권에 당첨되고 나면 그 뒤의 삶이 정상적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정직하게 노력해 얻은 것이 아닌데 정말 갑자기 터무니없이 큰 운수가 터지면, 자연 삶이 그런 기대감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삶 전체가 기형적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이었다. 과연 꼭 당첨된다는 보장이 있더라도 복권을 안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씀은 분명 타당한 점이 있지 않을까?
똑같은 논리로 “가피가 있을까 봐 기도 않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을까? 물론 기도의 본질로 본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말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양상을 본다는 이 말을 쉽게 부정할 수도 없다. 주로 어떤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라! 다 소원 성취 기도인데, 그 소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좁디좁은 이기심과 가족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좀 더 큰 서원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런 좁은 바람에서 기도를 한다면, 그 간절함으로 어떤 성취를 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욕망의 구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게 기도해 어떤 성취가 있었다 하자. 그러면 다음에도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큰 바람이 있으면 기도부터 하게 될 것이다. 물론 큰 의미의 기도, 정말 이상적인 의미의 기도라면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을 바꿔나가는 기도일 것이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기도가 그러한가? ‘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곳이 있고, 그곳은 전국에서 몰리는 기도인 때문에, 그 절의 모든 업무가 그 중심으로 짜이고 있으며, 그 수입 또한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형식의 기도가 영험이 있게 되면 복권 당첨자가 순탄한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양상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기도가 수행으로 이어지고, 또 자기를 보다 나은 존재로 향상시키며, 그런 향상된 존재의 덕성과 행동에 의해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도, 그런 이상적인 기도의 틀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기도병(祈禱病)’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측면에서 기도의 현실을 돌아보고 정말 참된 기도의 모습을 세워나가는 몇 가지 강령을 세워봐야 할 것 같다.
참된 기도란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로, 다른 종교의 기도와 불교의 기도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모든 기도가 다 과학적이고, 간절하게 바라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점만 강조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될까? 무조건적으로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기독교 쪽의 기도가 더 영험과 가피가 쉽게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기도해서 성취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개종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교의 기도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내가 없어서 매달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점이 불교 기도의 근본이다.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고 부처님께 매달리는 양상은 부처님을 격하시키고 모독하는 것에 가까운 행위이다. 부처님이 인색하게 ‘복 창고’를 지키고 있다가, 여법하고 성실하게 기도하면 그에 응해 하나씩 꺼내주시는 분인가? 부처님을 ‘복 창고지기’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은 이미 온전히 다 주셨다는 근본 관점에 서야 한다. 그것을 기도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미 다 주신 것을 확인하는 기도이기에 오히려 더 간절하다. 어디에 어떻게 부처님의 가피가 내려 있는지, 나의 품성을 돌아보고, 내 주변을 돌아보며 간절하게 부처님이 주신 것을 찾아가는 기도가 된다. 그러하기에 삶을 바꿔가는 기도로 나갈 수 있으며, 나와 세상을 아우르는 가운데 부처님이 주신 것을 실현해내는 건강한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본디 불교의 기도는 ‘감응도교(感應道交)’의 기도이다. 내가 기도드리는 대상이 밖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감응이다. 그러하기에 기도하는 대상의 위신력이 나에게 옮겨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가난한 이로서 빌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고, 내가 기도드리는 대상을 닮아나가서 그 위신력을 내 몸에서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언제나 없는 존재, 가난한 존재로 자신을 고정하는 기도의 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자신을 가난한 존재로 고정하는 기도는 큰 성취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고,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도병’의 모습을 띠게 되기 쉽다.
기도의 건강한 방향성이 필요하다
물론 기도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결핍에서 오는 강렬한 바람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생생한 삶의 바람에 바탕하기에 그만큼 간절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몰입을 낳으며, 그 힘에 의해 영험이 창출된다. 그 구조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단순히 이상적인 이론을 내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간절한 바람이라는 요소만 강조하면, 부도덕한 바람도 그 간절함만 지극하면 성취되는가? 성취가 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일념으로 바라는데 성취가 없다면, 그것은 기도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기도가 영험이 있게 되면 그 자체로는 성취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이룬 존재 자체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게 되며, 그 끝은 파멸적인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간절함을 잃지 않으면서 건강한 방향성을 지니는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 건강한 방향성을 부여하기 위한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과 아울러 종단 차원의 교육과 계도가 함께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방생 법회’라는 이름으로 물고기나 자라 등을 사서 강에 풀어주는 법회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생명을 살린다는 취지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생태 파괴로 이어지고, 방생용 물고기가 잡혀서 팔리기에 물고기에게 고통만 준다는 것이 밝혀져 차츰 없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을 가꾸어주고, 생태를 보전해 생명을 살리는 방생 법회가 사라질 이유는 없다. 기도가 올바른 방향성과 방법을 택하지 못하면 잘못된 방생 법회와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간절하게 빌면 된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기도하는 문제가 과연 어떤 문제인지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무조건 자기 자식 합격만을 빌기보다는, 입시라는 ‘지옥고’ 속에서 헤매는 수많은 청춘 군상들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 내 자식이 정말 건강하게 시험을 치러,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보아나가다 보면 시각이 넓어지고, 자신이 기도를 통해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진다. 무조건 내 자식만 붙게 해달라는 것은, 다른 집 자식 무조건 떨어뜨려달라는 것이 된다. 이런 인식의 확장 속에서 나의 기도는 점차 나 자신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우리 전체의 문제를 보는 기도로 옮겨갈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도가 서원으로 이어지는 계기이다.
그렇게 되면 간절함이 덜해져 기도의 영험도 줄 것 아니냐고 걱정할 수가 있다.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기도자의 의식 지평이 넓어지고 확고해졌기에 오히려 조그만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꿋꿋하고 힘찬 기도가 이루어진다. 나 자신의 마음가짐과 실천 속에 불보살의 위신력이 드러나는 원행(願行)이 나오게 되고, 수많은 주변의 인연 속에서 불보살의 가피를 보고 느끼게 된다. 참으로 환희심 나는 기도의 삶이 나오는 것이다.
기도는 삶 속에서 수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도의 간절함이야말로 수행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른 수행보다도 기도 수행에 동력이 크다는 말이다. 그 힘을 일상적인 삶에까지 연장시켜야 한다. 절에 가서 기도하는 그 집중의 힘이 이어져 우리 삶을 바꾸는 힘이 되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니 절에 가서 하는 기도의 연장선으로 우리 삶 속에 이어지는 새로운 기도의 방법을 계속 발견해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삶의 일정 시간, 또는 일정한 행위를 기도에 올리는 공양물로 여기고, 그 공양물을 정갈하게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행위를 해보자. 불보살님께 올리는 공양물이라는 의식이 얼마나 우리 행위를 맑고 깨끗하고 성실하게 만들겠는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자세가 나오지 않겠는가?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기도의 시간, 간절한 바람이라는 뜨거운 마음이 수행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시간에서 환희를 느끼고, 불보살의 가피를 확인하게 되면 물러남 없이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이러한 방편들이 계속 개발되면 우리 삶 전체가 기도요 수행인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시작은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다. 그것이 서원이 되고, 이제는 그 서원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는 삶이 이루어진다면…. 나의 삶이 바뀌고, 그 빛이 세상으로 나가는 참된 기도의 모습이 구현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성태용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건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사)한국철학회 회장,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우리는선우 대표를 역임했고, EBS에서 <주역과 21세기> 강의를 진행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주역과 21세기』,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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