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노년의 삶은 정신적 원숙함을 향한 여정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는 노년의 삶
마음을 잘 쓰는 회향의 시간
지안 스님
반야불교문화연구원 원장
나이란 무엇인가?
나이에 대해 말한 유행가가 있는 것을 들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와 ‘나이야 가라’라는 노래다. 어쩌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꼭 내 나이를 생각해본다. 요즈음은 고령화 시대가 되어 팔순이라도 옛날처럼 장수의 연세로 보지 않는 것 같다. 두보(杜甫)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시구를 쓰고부터 고희(古稀)라는 말을 써 칠십을 살기 드문 나이로 보았지만 ‘백세 시대’라는 말이 나온 것처럼, 적어도 구십이 넘어야 장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구십 세를 졸수(卒壽)라 하고 구십일 세를 백을 바라본다고 해 망백(望百)이라 하는데 내가 아는 분들 중에도 졸수와 망백의 연세를 넘은 어른들도 꽤 많다.
인생의 생(生)·로(老)·병(病)·사(死)를 네 가지 근본 고통으로 보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나이가 많아지는 것도 괴로움으로 간주된다. 세월이 가면서 한 해, 두 해 연륜이 포개지는 것이 결국은 무상(無常)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수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나’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니다. 이것을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하느니라.”
『상윳따 니까야』에 설해져 있는 이 말은 무상 속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서 늙어가는 것도 분명 무상에 속한 일이라 늙음이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나이가 나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시쳇말로 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라 할까. 물론 사람이 나이가 많아져 노년에 이른 것을 늙어온 것이 아니라 성숙해온 것이라 미화해서 하는 말도 있다. 과일나무가 자라 커서 열매가 맺혀 점점 익어가는 과정으로 노년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잡아함경』에 수록된 「소경인 십이인연경」에는 사람들이 바라는 세 가지의 희망 사항이 있고 또 싫어하는 적(敵)이 세 가지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바라는 바 세 가지는 건강과 안온과 장수라 되어 있고, 싫어하는 적(敵) 세 가지는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라 했다. 또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오복(五福)에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다섯 가지를 드는데 수가 장수를 말하는 것으로 첫 번째로 치고 있다. 물론 한 나라의 연령별 인구 분포 면에서 때로는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오래 사는 것은 그만큼 복을 누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역사에 나타나는 고승의 행장(行狀)을 통해 보면 최고의 장수를 누린 대표적인 두 고승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분은 당나라 때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이고 또 한 분은 근세의 중국 불교를 새로 세웠다고 평가받는 허운(虛雲 1840~1959) 대사(大師)이다. 두 고승 모두 120세의 장수를 누렸다. 이 두 고승의 경우에는 100세가 넘은 연세에도 매우 정정하고 활동적이었다고 한다. 조주 선사에 관해서는 장수의 비결에 답해준 유명한 말씀도 전해진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정정하고 활동적인 스님을 보고 어떤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을 물었다. 조주 스님은 이렇게 답해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시간의 부림을 당하고 살지만 나는 내가 시간을 부리고 산다오.”
이 말을 알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살지만 자신은 시간을 쫓아내고 산다는 말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시간의 템포가 빨라지고 시간을 맞춰야 되는 일이 많아 사람들이 지금 몇 시냐고 시간을 자주 묻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부림을 당하고 사는 모습이 아닐까? 나이도 시간이지만 이 말을 통해 보면 사람이 나이에 쫓길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야 가라’는 노랫말이 나왔을까.
내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인간의 구성 요소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 오온(五蘊)이라는 말은 불교의 기본 교리에 나오는 용어다. 이는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다섯 가지 무더기로 나누어 인간이란 존재를 분석해놓은 것이다. 색온(色蘊)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을 말한다.
수온(受蘊)은 외부의 경계를 대할 때 시각이나 청각이 일어나는 최초의 감각을 말한다. 상온(想蘊)은 생각이 형성되어 감각을 통한 느낌이 저장되는 것이다. 행온(行蘊)은 생각이 움직이면서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식온(識蘊)은 움직이던 생각이 인식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을 이 오온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교의 인간 설명의 기본이다. 이 오온이 합쳐진 것을 보통 ‘나’라고 생각하며 이것을 가지고 자아를 내세운다고 한다.
그런데 짧은 경문으로 가장 많이 독송되는 『반야심경』에는 이 오온이 공하다고 천명해놓았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말해놓은 것이다. ‘나’가 없다는 무아설은 불교 특유의 교설이다. 이 무아설은 ‘나’가 공해 실체가 없다는 공관(空觀)을 통해 반야(般若) 곧 지혜를 얻기 위해 내세운 설이다. 오온이 공함을 터득하는 것이 반야인데 세상의 경륜이 많고 인생 연륜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지혜로워진다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노년이 젊음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관되고 자신을 성찰하는 깊이가 더 깊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인생의 무상이나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는 것은 노년 쪽에 가서 더욱 절실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인간을 오온의 존재로 보지만 수도(修道)의 경지에서는 이 오온을 뜬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47~713) 선사의 「증도가」에 ‘五蘊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이라는 송구가 있다. “오온은 뜬구름 부질없이 왔다 가고, 삼독은 물거품 헛되어 생겼다 사라지네” 라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중생의 생사가 본래 없다는 말도 있다. 물론 깨달음을 추구하는 출세간법(出世間法)에 의거해 한 말이지만 『열반경』에도 ‘생사는 본래 헛된 것’이라 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생사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어느 날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이 말했다.
“나는 사는 것을 원하지도 아니하고 죽는 것을 원하지도 아니한다. 품팔이가 품삯을 기다리듯이 나는 내게 올 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또 죽은 망인(靈駕)을 위해 읊어주었다는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난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진 것이라오(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하는 말도 많이 회자되는 송구다.
인생의 회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때 윌빙(well-being)이니 웰다잉(well-dying)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잘 살고 잘 죽는다는 말인데 결국 잘 살면 잘 죽는다는 결론도 가능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세세생생 생사를 반복하는 중생의 윤회 속에서는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웰다잉도 웰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의 불교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마음을 잘 쓰고 생활한다는 것이다. 부귀와 영예를 누리면서 호의호식하는 것을 잘 산다고 보지 않는다. 불교의 수행을 용심공부(用心工夫)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음을 잘 써야 선업이 지어지고 공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화엄경』 「정행품」에 ‘선용기심(善用其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금강경』의 ‘항복기심(降伏其心)’과 대조적인 말이다. 『화엄경』은 진심(眞心)을 잘 쓰라 하고, 『금강경』은 망심(妄心)을 항복하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그 마음을 잘 쓰라는 가르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품 전체에 예시(例示)되어 있다. 심지어 양치할 때와 화장실에서 용변을 할 때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가 하는 사례를 말해준다. 언제 어디서든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로움이 미치게 하겠다는 원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라는 내용들이다. 내 존재의 가치가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이타정신(利他精神)의 수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타심을 베푸는 것을 회향(廻向)이라 한다. 회향은 보살도 실천의 필수 요목으로 내게 있는 모든 공덕을 남에게, 좋은 곳에, 더욱 의미 있는 곳에 돌려준다는 뜻이다.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 회향의 정신이다.
노년은 인생의 회향을 생각하며 금생 한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기라 생각된다. 한 생을 살고 나를 고맙게 생각하고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일이고 잘 산 흔적이라고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지안 스님
통도사 강원 강주를 비롯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고시위원 및 역경위원장, 조계종 종립 승가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통도사 반야암 회주, 반야불교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금강경 강의』, 『기신론 강의』, 『신심명 강의』, 『기초 경전 해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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