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크손과 생명의 시간

베르크손과 생명의 시간

최화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 1859∼1941)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지속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한 사교계의 모임에서 “당신의 철학을 간단히 설명해주세요”라는 어느 부인의 질문을 받자 “저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베르크손이 생각하기에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이란 진정한 시간이 아니고 시계가 표시해주는 시간, 즉 시계판이라는 공간에 표시되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며, 그런 시간은 공간의 눈금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은 더 빨라도, 더 늦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따라서 시간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하는 시간은 조금이라도 더 빨라지거나 더 느려질 수 없는 시간이다. 설탕이 녹아서 설탕물이 되기까지 불가피하게 기다려야 하는 그런 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다. 그런 진정한 시간을 베르크손은 지속이라 부른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생각한 시간은 시계판에 공간적으로 표시되는 시간, 즉 공간화된 시간이었다. 그것은 물리학에서 생각하는 시간, 즉 일식이 언제 올지를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일식을 계산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몇 년, 몇 십 년이 걸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 시간, 그래서 세상에 달라질 것이 없는 동질적인 시간이다. 일식 현상의 예측에서 말하는 시간은 오늘부터 첫 번째건, 두 번째건, 몇 번째건 상관없이 지금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며, 따라서 시간이 얼마를 흐르든 관계없는 시간이며, 시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시간이다. 베르크손이 시간은 있다고 할 때의 시간은 그와는 달리 단 몇 초의 생략이나 덧붙임을 허용하지 않고 매 순간 변하는 이질적인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우리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시간은 어떤 때는 빠르게, 어떤 때는 느리게 가며 매 순간 질적으로 달라지는 시간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의 선율을 생각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베토벤 <운명>의 모두에 “빠, 빠, 빠, 빵—” 하는 선율을 생각해보자. 그것을 “빠, 빠, 빵—”이라 하거나 “빠, 빵—, 빠, 빵—”이라 한다면, 그 음악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단 한순간만 달라져도 그 음악 전체가 달라지는 선율, 즉 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간은 질적으로 매 순간이 다르며, 조금의 생략이나 덧붙임도 허용하지 않으며, 전체가 상호침투해 불가분적인 하나의 선율을 나타내는 시간이다. 그것이 베르크손이 말하는 지속이다.

지속이 이렇게 이질적인 이유는 기억의 현상 때문이다. 기억은 우선 옛것을 잊지 않고 남겨둔다는 의미로 이해되겠지만 사실은 바로 전의 시간이 없어지지 않고 바로 후의 시간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생명의 존재 방식은 고도의 긴장 상태로서 전건이 잊히지 않고 후건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전 순간은 그대로 보존된다. 그 전체가 모여 우리의 성격을 형성한다. 우리의 매 순간에 이후의 순간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현 순간은 전 순간까지의 모든 기억에 새 순간이 덧붙여지는 것이고, 거기에 다시 새 순간이 더해지고, 이런 식으로 계속되며, 따라서 단 한순간도 같은 순간이 없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생명체에 공통적인 것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라질 수 있다. 물론 무생물도 물이었다가 돌연히 불이 되고, 불이었다가 돌연히 돌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다고 해야겠지만 하여간 그것이 기억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 글의 주제가 생명의 시간이니 우선 생명의 시간은 기억이라고 말해두자. 처음에 우리의 시간은 지속이라 했을 때, 그 지속이 바로 기억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인간은 동물로서 생명의 한 가지를 이루고 있으니 당연히 기억이 있고, 그것이 발현된 것이 진정한 시간인 지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둘을 구별하기보다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부터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그렇다면 왜 시험 칠 때는 공부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가? 우선 기억에는 정신적 기억과 신체적 기억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는 다시 배울 때의 기억을 하지 않고도 그냥 떠오른다. 그것이 신체의 기억이다. 신체의 기억은 몸에 구현되어 있으니 항상 기억이 나지만 정신적 기억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전 생애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 기억이 모든 순간 다 떠오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기억하느라 시간을 다 쓰고 정작 사는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이 기억을 하는 것은 기억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 세계에서 행동하기 위해서이다. 생명체는 한편으로는 기억을 떠안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밖으로 행동해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생명체는, 특히 동물은 행동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니 행동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억누르고 필요한 것만 나오게 해야 한다. 그 장치가 바로 뇌이다. 그러니 뇌는 기억의 저장소가 아니라 망각의 장치이다. 물론 더 정확히는 필요한 기억만 나오게 하는 장치이겠지만, 필요한 것을 나오게 하려니 다른 것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망각의 장치라 한 것이다. 그러면 기억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기억의 세계에 있다. 그 세계는 어디인가? 정신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냐고? 어디라는 것은 물질적 표상이다. 정신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질과 단 한 곳에서만 만난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 전체에서이다. 이것을 단지 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뇌는 신체를 움직이는 사령탑이지만, 뇌 자체가 신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체 전체의 조건에 따라 기억의 어느 부분이 동원된다. 베르크손의 유명한 뒤집혀진 원뿔과 꼭짓점에 접한 평면의 그림(원뿔이 기억이고 평면이 물질계이다.)은 기억과 신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이지만 이 꼭짓점은 점이지만 신체 전체를 나타낸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지각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데, 이때 우리 지각은 세계 밖으로 나가 있다. 우리의 지각은 사물이 있는 곳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우리 뇌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뇌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면 야구공을 잡기 위해 공이 오는 밖으로 손을 뻗는 것이 아니라 뇌 속으로 손을 뻗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생명 기능은 물질계 전반과 만나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서 물질 전반과 생명의 기능이 만나고, 그 둘 사이의 타협안(modus vivendi)이 우리가 일정하게 흐른다고 느끼는 시간이다. 즉 물질의 흐름과 그에 반해 흐르는 생명의 흐름이 만나서 이루어진 타협점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시간이다. 생명은 지구 표면의 한쪽 구석에 움츠러들어 살고 있는 생명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우주와 만나서 타협안을 만드는 강력한 흐름이다. 인간은 그 흐름 속에서 지성을 통해 자유를 향유하는 가장 독특한 존재이며, 인간 쪽에서 생각한다면 생명의 흐름 자체로 파고들어가 그것과 일치하는 신비주의에 이를 수 있는 존재이고, 그를 위해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물질계를 거느리는 신비적 존재이다.

최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프랑스 파리-소르본느대(파리 IV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경희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박홍규의 철학: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있고,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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