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노라
남해 호구산 용문사
권력보다 백성을 생각하고 성리학보다 불교에서 대안을 찾던 선지식
호구산 용문사를 찾는 이라면 반드시 주차장 초입에서 발걸음을 멈춰야만 한다. 관모를 쓰고 죽장을 짚은 꼿꼿한 선비 한 분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문호, 서포 김만중 석상이다. 서포 석상은 앵강만 바다에 삿갓처럼 봉긋 떠 있는, 자신의 유배지 노도(櫓島)를 바라보고 있다. 한양에서 공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서포였지만 유배지 남해에서는 ‘노자 묵자 할배’로 불렸다. 모두가 치열하게 일하며 사는 땅에서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는 선비는 그저 놀고먹는 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다. 처첩의 갈등을 그린 이 소설에서도 구도자적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구운몽』 역시 모든 것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금강경』 가르침에 바탕을 둔, 불후의 명작이 아니던가. 서포는 남해 3년여 유형의 삶을 용문사를 참배하고 불교를 공부하며 견뎌냈다. 용문사 초입에 그가 서 있는 이유다.
왕실이 지정한 수국사(守國寺)
용문사는 지장 도량으로 유명하다. 용문사는 어떤 연유로 손꼽히는 지장성지가 되었을까?
원효 스님께서 절을 개창하신 뒤 지장보살을 조성해 어머님을 위한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속에 용문사가 지장성지가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개연성 있는 부분은 임진왜란 이후 용문사에서 줄곧 열려온 수륙재다.
물과 육지에서 희생당한 영혼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베풀어 좋은 곳으로 보내는 의식이 수륙재다. 수륙재에선 불법승 삼보에 이어 천장(天藏), 지지(地持), 지장(地藏) 등 삼장보살에 대한 의식이 진행된다. 세 분 지장보살님께 귀의하며 죽은 이를 천도하고 살아 있는 이들의 영혼까지 정화하는 자리다. 수륙재 현장에 내건 괘불탱화가 보물 제1446호로 지정될 만큼 용문사에서 장대한 규모의 수륙재가 열렸다, 전란의 피해로 계층을 초월해 망자를 천도하는 수륙재가 성행하면서 지장보살은 백성의 중심적 신앙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서포 김만중은 숙종의 아내 인경왕후의 숙부였다. 사학자 박성재는 서포의 타계 소식을 접한 왕실에서 그의 극락왕생을 위한 수륙재를 용문사에서 모셨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그 증거가 조선 숙종 때 용문사를 수국사로 지정한 것이다. 절 안에 왕실의 지원을 받는 축원당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지금도 왕실로부터 하사 받은 수국사 금패 등의 유물이 전한다. 국가로부터 수국사로 지정되면서 용문사의 위상은 사뭇 달라졌다. 그리고 그 명성이 오늘날의 지장성지로 이어져온 것이다.
지난 2019년 봄, 경내 뒤편에 지장삼존대불이 조성되었다. 좌상 석불로선 3층 건물 높이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다. 온화한 미소의 지장보살님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셨다. 도명존자는 부처님의 수제자 아난존자처럼 지장보살을 시봉하는 분이다. 무독귀왕은 망자의 명부를 관리하는 지옥세계의 왕이다. 지장 세계의 이야기가 한눈에 펼쳐지는 공간이 생기면서 용문사는 명실공히 진여(眞如) 지장 도량이 되었다.
신라의 원효 스님은 남해 보광산을 찾아 보광사를, 해발 650m의 호구산에는 첨성각(瞻星閣)을 각각 세웠다. 별의 움직임을 살피는 곳이다. 새벽별을 보며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처럼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의미에서 수행자 처소를 첨성각이라 한다. 같은 자리일지 알 길 없으나 지금도 용문사 대웅전 오른편에 첨성각이 있다. 보광사의 사운이 기울자 1660년 백월 스님은 호구산 남쪽 용연이 있는 좋은 자리로 절을 옮겨 용문사라 했다. 미국마을이 끝나는 깊숙한 곳에 용문사가 있다. 절을 끼고 바다로 흐르는 용문사 계곡은 남해 제일의 계곡이다.
천년 고찰 용문사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특히 보물 제1849호 대웅전은 처마 아래 여섯 마리의 용머리가 수려할 뿐 아니라 대웅전 안 용들도 생동감 넘친다. 닫집 장엄도 뛰어난 솜씨다. 그러나 무엇보다 천장에 섬세하게 새겨진 거북과 게, 뱀장어를 비롯한 물고기, 해초 등을 찾아봐야 한다. 명부전에는 시왕님과 함께 고려 때 조성된 다부진 이미지의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고려 시대 조성되었음에도 참배객들은 원효 스님 때의 지장보살이라 믿는다. 이곳 지장보살 좌대에는 무려 열두 마리의 용이 다양한 표정으로 새겨져 있다.
광대무변한 자비를 지닌
지장보살의 대원력 잊지 않아야
신라에선 참회가 중심을 이루던 지장 신앙이었다면 갖은 전란을 겪으며 고려인들은 내세 구원 쪽으로 지장 신앙이 깊어져갔다. 조선 시대 이후로 지장 신앙은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위한 영가 천도가 강조되면서 원력과 수행보다 망자 천도가 중심을 이룬다.
본디 지장보살은 ‘대지의 신’과 같은 의미다. 마치 만물을 소생시키는 대지처럼 무수한 종자를 품고 있다 해서 ‘지장(地藏)’이라 부른다. 먼 훗날 미래불이 오실 때까지 육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노라, 이들이 구제되지 않는 한 자신도 끝내 성불하지 않겠노라, 중생을 위해 ‘성불’이라는 목표까지 포기하신 분이다.
지장 도량 용문사에서 지장보살, 그 이름을 염하면서 생각해본다. 2023년의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꺼이 내려놓고 포기하고 접을 수 있을까. 또 궁극의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정진할 수 있을까. 만물을 소생시키는 대지처럼 우린 어떤 종자를 품고 길러낼 것인지, 우리의 대원력을 단단히 챙겨야 할 것 같다.
글|이윤수
방송작가. 문화 콘텐츠 전공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사)문화예술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연등회의 역사와 문화콘텐츠』가 있다.
사진|하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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