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의 꽃, 돈오
수불 스님
안국선원 선원장
화두가 익어서 의심 덩어리[疑團]가 홀로 드러나 안팎이 한 덩어리가 되면, 단지 화두가 타파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시절 인연이 열리면 마른하늘에 벼락 치듯, 매미가 허물 벗듯,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홀연히 ‘댓돌 맞듯 맷돌 맞듯[築著磕著]’ 의심 덩어리를 타파하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마치 나무통을 맨 테가 ‘팍!’ 하고 터지는 것처럼 의심 덩어리가 깨져나간다. 그 통쾌함은 맛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가 훤히 밝아져서, 불조가 하신 말씀의 당처가 밝게 드러날 것이다. 화두가 타파되면, 마치 소나기가 내린 뒤 먹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몽땅 드러나듯 확연해서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통쾌하다.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듯이 분명하다. 그러면 그동안 알 수 없었던 공부상의 인연들이 드러나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대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이 일단의 일을 알 수 없어 그렇게 갑갑하던 것이 몰록 텅 비게 된다. 온몸과 마음이 새의 깃털보다 가볍고, 앞뒤가 탁 끊어져 툭 터진 것이 탕탕 무애하니 끝 간 데가 없다. 평생 짊어지고 다니던 짐을 일거에 내려놓아 홀가분해진다. 이와 같은 시절 인연은 직접 체험해본 자만이 안다. 안으로 뭔가 큰 변화가 왔을 뿐만 아니라, 심신이 가벼워서 얼굴은 마치 연꽃이 핀 것처럼 환해지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된다.
크게 깨달을 때는 마치 큰 꿈에서 홀연히 깬 것과 같다. “저 바다 밑에서 차를 달인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활활 타는 불 속에서 연꽃이 핀다”, “돌계집이 아이를 낳는다”, “바다 밑에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바위 앞의 돌 호랑이가 새끼를 안고 존다.” 이런 말들을 화두를 타파하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직접 거쳐오면서 겪어낸 일이니 새록새록 실감이 난다. 고인들이 먼저 이 일단의 일을 경험하고서, 단계 단계마다 이렇게 기가 막힌 비유로써 표현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와 같이 통 밑이 빠지는 경험을 했을 때는 빨리 선지식을 찾아서 점검을 받아야 한다. 공부한 후에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면, 더러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화두를 타파한 공부인이라면 속히 선지식을 찾아 점검받고, 그 뒤의 일을 부촉받아야 한다. 처음 깨어난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인연을 길러가야만, 결국 심안이 완전히 열릴 것이다. 공부한 것까지도 내려놓고, 흐름에 맡겨 세월을 잘 보내야 한다. 늘 살얼음 걷듯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는 ‘무수이수(無修而修)’라는 말이 요긴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자세를 낮춰 겸허하게 정진한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다.
꿈 깨고 난 뒤에는, 실상이 훤히 드러나서 발을 딛는 곳마다 실지(實地) 아닌 곳이 없다. 하지만 비록 돈오를 체험했더라도, 아직 상(相)이 완전히 소멸된 입장이 되기는 어렵다. 육조 스님에게도 ‘앞의 돈오’와 ‘뒤의 돈오’가 있었다. 전자는 나무꾼 시절에 객점에 나무 팔러 갔다가 어떤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데, “마땅히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낼지니라”는 대목을 듣고 곧 마음을 깨친 것이다. 후자는 그 후 오조 홍인 선사를 찾아가 8개월간 방아를 찧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오조가 설하시는 『금강경』을 듣고 이전과 같은 대목에서 언하에 확철대오했다.
육조 스님도 후자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사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전자의 체험에서 나온 게송이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였다면, 후자에서 나온 게송은 “자성이 만법을 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何期自性 能生萬法]”였다. 육조 스님도 후자에 와서야 완전히 중도를 깨달았던 것이다. 중도를 깨달아야 상(相)이 없는 자리에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연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므로 비록 돈오는 체험했지만 아직 상이 남아 있는 공부인은 계속 마음자리가 눈앞에 생생히 ‘활구’로 드러나도록 정진해서, 마침내 분별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 이때는 가급적 선지식을 자주 친견해 가까이 있으면서 경책을 받고, 선지식의 ‘법 쓰는 법’을 익혀가야 한다. 순수한 수행자의 정신과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수행하면 할수록 인과(因果)를 더 철두철미하게 믿게 된다. 청정 계율을 지키며 무위 본연의 자세를 견지할 때, 탐·진·치 삼독이 계·정·혜 삼학으로 전환된다. 그러면 ‘번뇌 즉 보리’의 이치가 저절로 터득될 것이다.
모를 때는 하는 일마다 고통이 발생하지만, 알고 나면 무슨 일을 해도 흔적이 남지 않아 대자유인이 된다. 자연히 복과 공덕과 원력이 증장된다. 공부길이 훤히 드러난 이후라야,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 이전에는 ‘참선’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선’을 하는 것이다. 도는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화두가 타파되어 실질적인 공부 인연이 열렸다면, 노력을 빌릴 것도 없이 저절로 수행할 수 있는 큰 힘이 그 속에서 나온다. 그래서 화두를 타파하고 난 뒤에는 더욱 진중해야 한다. 엄밀한 단련을 거쳐서 완전히 익어야 비로소 남을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 공부를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을 잘 살펴가면서 탁마를 아끼지 않고, 서로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이 도를 지닌 자의 할 일이다. 따라서 공부하고 난 뒤에는 더욱 하심(下心)해야 한다.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종고 스님도 몇 번이고 거듭 체험하고 난 뒤에 천하의 법기(法器)가 되었다. 한 고비를 넘기고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에도, 향상일로를 걸으면서 정진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작은 것을 얻고서 만족해 머물면 안 된다. 공부가 깊어갈수록 더 겸허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자타에게 정직해야 한다.
철두철미 내외명철한 구경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흐름에 맡겨 은인자중하면서 온몸으로 숙지해야 한다. 공부가 익을수록 뒤로 숨어서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부인이라면 지혜마저 없앨 수 있는 공부 인연을 살펴야 한다. 지혜를 얻으면 번뇌망상을 어느 정도 갈무리할 수 있지만, 자칫 지혜가 또 법상(法相)의 가시가 되어 애먹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깨달음을 놓아야 미혹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보리자성은 본래 청정해서 끝내 조금도 얻은 것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남을 가르칠 수 있는 힘이 나올 것이다. 이런 병통, 저런 병통, 병통 아닌 것이 없다.
철저하게 마음을 비우고 믿음으로 실천하면서 진정으로 보현행원(普賢行願)의 힘을 길러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고, 진정한 불사(佛事)이다. 우리는 이 공부를 함께한 이상, 최선을 다해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이 시점부터 미래가 다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가, 그 정진의 끝을 모든 인연 있는 이들과 함께 회향하겠다는 자세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간화선 수행을 통해 한국 불교가 살아나고, 나아가 인류를 구원하는 간화선의 세계화가 실현되는 밝은 내일이 반드시 올 것이다.
• 이번 호를 끝으로 <간화선의 A에서 Z까지> 연재를 마칩니다.
수불 스님
범어사 주지와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안국선원 선원장, 부산불교방송 사장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간화심결 간화선 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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