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삶과 죽음을 성찰하다

죽음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김은중
다큐멘터리 작가


저는 잠에 들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늘 신비롭게 생각해왔습니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우리는 잠과 깨어남 사이의 간극에서 그런 비슷한 느낌을 갖는데요. 꿈을 꾸지 않고 잠에 빠질 때,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그곳, 중간 지점에 있게됩니다. 만약 이 중간 지점에 끝이 없다면, 만약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이건 아주 호기심을 자극하는 생각이죠. 이런 생각은 우울하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제 삶에서 하는 모든 다른 생각보다 가장 창의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런 생각을 하죠.

이건 많은 어린이들이 묻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엄마가 만약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나는 누가 되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존재하지 않음, 또는 완전한 비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창조적인 사고라고 봅니다. 이런 생각과 완전히 반대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아주 기묘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서양에서는 죽음 후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두 가지 지배적인 생각들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옛날 사고방식. 저는 이런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니라 옛날 사고방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생으로 간다라고요. 천국, 연옥, 아니면 지옥으로요. 그런데 누가 알 수 있나요?

또 다른 생각,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일반적 생각은 우리가 죽으면 존재하기를 멈추고 그게 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 모두 이런 상상을 하는 건 정말 우울합니다. 어둠 속에 완전히 갇혀서, 그렇게 아주 영원히 암흑 속에 생매장당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죽음 속에서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의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동양에는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동양의 일반적 생각은 환생의 개념입니다. 한 삶을 거치고 다른 삶으로 또 다른 삶을 거치는 끝없는 연속입니다. 이런 사상이 설명될 때, 우리가 처음 묻는 질문은 “이게 사실일까?”, “환생에는 과정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심오한 사상가들인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만 이건 증명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건 매우 자명한 개념이죠.

제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진술을 한다고 가정합시다.
진술 1. 내가 죽은 후에 다시 아기로 태어나지만 이전 생애는 잊게 된다.
진술 2. 내가 죽은 후에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저는 이 두 가지 말이 정확히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린 두 번째 진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기들은 늘 태어나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죽은 후에 온갖 새로운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왜 저는 이 두 가지 진술이 같다고 생각할까요?

결국 당신이 죽고 당신의 기억이 끝나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우리는 기억이 없어지면 우리의 지속성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매혹적인 것은 기억이 다음 생애로 이어지지 않아도 죽음이 의식의 끝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해서 죽음을 어둠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칸트식 사고방식에 의해 속는 겁니다. 끝없는 무는 생각조차 불가능해서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무언가에 대한 개념, 감각이 있어야 우리는 개념을 갖는데, 하물며 존재 반대의 무의 개념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와 유, 이 두 가지는 한 짝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한 존재의 사라짐에 의해 또 그의 기억 시스템의 사라짐으로 만들어진 진공은 또 다른 존재에 의해 채워진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자신이 ‘나’라고 느끼는데 그럼 내가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로 존재하는 것,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느낌은 나 하나라는 단수에서 경험되는 겁니다. 당신은 두 개의 ‘나’ 또는 세 개의 ‘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 생각은 세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 기억의 사라짐과 죽음은 슬퍼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기억, 사람들과 사건들을 영원히 붙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 공간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것들을 영원히, 정말로 영원히 사랑한다면, 아주 먼 미래에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드나요? 지겨워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승을 알지만, 한편으로는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경외심을 새롭게 하는 것들을 잊게 되어서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아기로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에 눈을 떴을 때 색들이 얼마나 선명하고, 모든 것이 보석 같고, 별들은 얼마나 멋지고, 나무들은 놀랍게도 살아 있고, 이건 모두 이것들이 당신 눈에 새로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당신이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처럼 말입니다. 하루는 집에서 예전에 읽었던 미스터리 책을 찾아 읽으려 하는데 수년, 아주 오래전 읽었던 책입니다. 이제 줄거리는 다 잊어버려서 글을 읽으면 다시 흥분됩니다. 하지만 그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다면 흥미가 떨어집니다. 결국 망각의 시혜로 세상은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또다시 보고 사랑하고 우리가 친해진 사람들을 깊이 애정하게 되고 늘 그 강도가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전에 본 적이 있고 항상 보고 있었다는 그런 대조가 없이도 말입니다.

이런 생각의 또 다른 결과는 아주 기이한 깨달음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나는 누가 되었을까? 만약 내가 너라면, 내가 쉽게 네가 될 수도 있었을까? 내가 아주 쉽게 중국이나 인도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을까? 그런데 왜 나는 다른 곳이 아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중심이라는 생각을 할까?

당신은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이들도 당신처럼 같은 느낌으로 산다는 걸 알게 되죠. 모든 사람의 이름은 ‘나’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그렇게 부르고 있잖아요. 결국 이 세상에서는 ‘나’들이 항상 있게 됩니다. 모든 ‘나’는 어떤 면에서 다 같은 ‘나’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이건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의식이 있는 어느 곳에서는 이렇게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눈을 통해 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연민이라는 위대한 덕의 비밀입니다.

이 글은 미국의 철학자 앨런 와츠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 짧은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앨런 와츠(Alan Watts, 1915~1973)
영국 출생의 미국 철학자이다. 그는 뉴욕에서 선을 수련했으며, 시버리 웨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선의 방법』(1957)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서양철학자이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 그는 수많은 라디오 강연과 대중 강연을 했으며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했다. 그에 대한 상세한 아카이브는 www.alanwatts.org를 방문하면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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