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불자인가 | 나의 불교 이야기

나는 왜 불자인가

김성규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수억 겁을 살아도 오늘 이 하루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늘 이 하루는 세세생생 살아도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하루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하루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차 한잔을 하면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중국 드라마 <대명안찰사> 마지막 회 방영을 보게 되었다.

안찰사는 조선 시대 암행어사와 비슷한 직책이다. 황제의 명을 받고 절강성의 비리를 조사하러 갔다. 조사의 끝은 황제의 금위영을 이끄는 대장까지 이어진다. 안찰사와 금위영 대장은 동서지간이다. 안찰사는 권력의 끝에서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왔고, 금위영 대장은 황제 밑 제2의 권력자이며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권모술수와 비리의 정점에 서 있었다. 정승인 장인이 내막을 알게 되자 금위영 대장은 장인을 암살하고 장인 살해의 누명을 안찰사에게 덮어씌우고 안찰사는 황제에게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사형 전날 금위영 대장은 안찰사를 찾아와 바둑을 두며 술을 한잔 나누면서 서로 평생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기를 하게 된다. 안찰사가 금위영 대장에게 말했다. “30년 전 처음 만났고 젊고 정의로웠던 그 기백으로 황제를 모시고 전쟁을 누빈 그때로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자네의 비리를 그냥 내 가슴에 묻고 간다네. 우리의 인연은 젊은 시절 백수인 자네와 처음 객잔에서 만났을 그때부터 시작되었지 않았겠나.”

관계하고 있는 수억 겁의 세월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50년 전의 나를 되돌아보면 그곳에 이미 오늘의 씨앗들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는 원인이 있어 지금의 상황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처음 접했던 고교 시절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여름방학 동안 남산 칠불암에서 함께 공부했던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며, 불적을 찾아 천방지축 돌아다니던 그때 그 모습들.

남산을 뒤흔들어놓던 새벽 종성과 목탁 소리. 옛날 원효와 대안이 참선했다던 참선대에 앉아 아침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경이로움. 남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면 세속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것처럼 반짝이는 눈빛. 설익은 수행자들의 모든 재롱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칠불암 부처님. 남산의 그 혼 속에서 불교는 익어가고 있었다.

분황사와 경주고등학교 강당을 들락거리며 영남불교 학생회 300여 명이 함께 가진 동계 수련 대회. 경주 시내 도량식을 마치고 너무 추워 손과 발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말도 할 수 없었던 기억들.

표충사 수련 대회 준비한다고 세제 풀어 수십 년 묵은 때를 땀 뻘뻘 흘리며 밀고 밀던 일이며, 해산 스님의 그 자상한 미소. 수련 대회 중 1080배를 마치고 났을 때 새벽의 의미와 함께 온 전신을 엄습한 환희로움은 50년이 지난 오늘도 잊히지 않고 생생한 감동으로 남아 있는데….

어쩌면 철이 들기 시작하고부터 이제까지 50년 동안 나의 뇌리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화두는 “불교 중흥으로 인류 평화”였다. 한때는 조직과 경제력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불교 활동을 통해 얻은 결론은 조직도 경제력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우주라는 거대한 유기체 속에 지구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한 점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한 점의 요동으로 전체 유기체는 변화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조직체는 절대 변하지 않을 철옹성 같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 사회나 승단이라는 조직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한 인간의 의지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느냐’ 하는 문제이며,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인간에 내재해 있는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절제와 직시를 통해 깨끗함과 올바름과 깨달음을 증득해 진리,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왜 발전하지 못하고 부패하고 멸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조직이 갖고 있는 이기성과 독단성과 우매성의 절제와 직시를 통해 윤리성과 행복성과 진리 지향성을 증득해 인류를 자유와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왜 불자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자다가 일어나 생각해도 부처님의 은혜에 가슴이 사무친다. 이렇게 좋고 바른 법을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화두였다.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기로 인식하며, 연기로 인식한 문제들을 사성제로 푸는 것이다. 사성제로 문제들을 해결하다 보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나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러면 불교적인 방법으로 나의 신앙생활을 지속하면 불자가 되어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당당한 나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절에 천년을 다녀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 때는 불자가 아니다. 국자가 천년을 국을 떠 날라도 국맛을 모르듯이.

불자는 현재 불교 상황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따르고, 불교적인 방법으로 신행생활을 하며, 주기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불자로 인증하는 삼귀의와 오계 계첩을 받아야 한다.

불자(불제자) = ① 연기로 인식하기 + ② 사성제로 사고하고, 해결하기 + ③ 삼귀의계와 오계 수계하기 + ④ 불교적인 방법으로 수행과 신행생활하기 + ⑤ 법회나 예불에 참석해 주기적으로 신앙생활하기

①과 ②는 일정 기간을 통해 부처님의 생애와 불교 교리를 대학에서 개론 배우듯이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평생 가르치신 진리는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주의 진리이다. 불교를 배우고 불교적인 삶을 이해하고 불교적인 삶을 살겠다고 서원을 하면 ③ 수계를 받아야 한다. 깨달음과 올바름과 청정함으로 이생을 살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이 서원을 실행하기 위해서 오계를 지켜야 한다. 매일은 못 지키더라도 불자라면 4재일에는 지키는 기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경전을 독송하거나 참선을 통해 ④ 불교적인 수행을 일상화해야 한다. 단체나 사찰을 통해 ⑤ 새벽 예불에 참여하거나 일요일 법회에 참석하거나 주기적으로 신앙활동을 해야 한다.

위에 열거한 이러한 조건들을 행할 때 불자가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영원하겠지만, 사회 속에서 시대와 함께하는 불교를 전도하는 교단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자가 있어야 된다. 한 명이 불법을 알아도 세상은 불법 바다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간혹 조직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에 빠지기도 하고, 지배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이익의 창출을 위해 우리를 허구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자신의 문제로 귀착된다. 결국 진리는 진리일 뿐이다.

투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젖어드는 가슴을 죽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중봉 선사의 말을 옮겨본다.

道心堅固 須要見性 (도심견고 수요견성)
도를 닦는 마음을 견고히 하여 모름지기 반드시 견성할지어다.

김성규
영남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 의과대학 방사선종양학교실 교수를 거쳐 현재는 영남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통섭연구원 대표로 있다. 저서로 『불교적 깨달음과 과학적 깨달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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