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나를 평화롭게 하리라 | 숲이 사람을 살린다

산이 나를 평화롭게 하리라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세상의 시비로 마음이 어지러운 날, 산에 올라 산수풍경을 바라본다. 이것저것 따지는 세상과 같이 여러 봉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고 산은 끝없이 흘러 아득한 경관을 펼친다. 그런 산봉우리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것이 높은 것 같다가 어떻게 보면 저것이 더 높은 것 같다. 내가 저 봉우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또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지에 따라 봉우리의 높낮이에 대한 느낌은 모두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세상에서는 “내가 맞다”라고 서로 우긴다. 세계의 일부분만 볼 수 있는 인간에게 자기 생각이란 편견일 뿐이지만, 자기가 인지하는 영역이 세계 전체라는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기의 생각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편견이라고 확신한다. 이럴 때는 산에 올라보는 것이 좋겠다.

산행의 좋은 점은 숨이 차고 땀이 나 사소한 번민을 잊을 수 있고 굽이굽이 변하는 풍경과 언덕의 탁 트인 경관을 보며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마루에 오르면 가까운 봉우리에서는 나무도 보이지만 좀 먼 봉우리는 개별 나무는 식별할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녹색 질감을 가진 거대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더 멀리 시선을 펼치면 나무고 산이고 특정 형태를 띤다기보다 그저 푸른 파동으로 푸른 하늘과 이어지며 아스라이 사라진다. 거기에 녹아든 나 역시 욕심에 따라 일어나던 번뇌도 잊어버리고 이 산 저 산 할 것 없이 그저 온통 한통속으로 하늘과 땅과 내가 한마음이라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는 사유 놀이를 해도 좋다. 우리가 한 산의 봉우리를 하나둘 세지만 사실 한 산의 봉우리는 무수히 많다. 우리가 집착만 버리면 조금 솟아오른 것은 무엇이라도 봉우리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한 산을 이루는 봉우리는 무수히 많은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우리가 산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아무리 많은 봉우리라도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이름만 남는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름을 붙일 때도 조심해야 하지만 이름 속에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산들이 모여 지구가 되고 이런 별들이 모여 우주가 되는 과정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한 단계에 집착한다는 것은 나를 어디 한 군데 가두는 일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 연결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든다. 먹고 배설하는 사이에 나라고 고집하는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기대며 나를 이루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순환하며 일생을 이루고 세상에서는 세대가 이어지고 인류가 진화했다. 더 큰 범위로 포유류의 진화는 척추동물의 진화로 넓어지고 다세포 생물을 거쳐 지구의 생물 진화 과정을 잇는다. 지구를 품은 태양계는 더 오래가겠지만 우주의 품 안에 있고, 결국 우주에서 우리의 사유는 한계에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의 바탕은 영원, 즉 무(無)다. 봉우리와 산이 이어지며 멀리 퍼져 산그리메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리듬이다. 여기서 무한을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석가모니 설법에는 무한을 꿈꾸게 하는 수량화가 많이 나온다. 어떨 때는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이것이 법문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이것이 무한을 이해하게 만드는 방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무한은 집착을 녹여 사라지게 만들고 자유롭게 만든다. 우리는 들숨과 날숨의 사이는 짧고 우주의 수명은 무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석가모니의 설법을 가만히 생각하면 들숨과 날숨의 사이나 우주의 수명은 길이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현대 수학에서 말하는 무한의 개념과 같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몇 초나 우주의 나이인 138억 년이 무척 다른 것 같지만 무한대(∞)로 나누면 모두 0이다. 즉 아무것도 아니다. 무한을 체득한 자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유한에 머물러서는 아무리 길어도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 우리가 보는 우주는 유한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우주의 종말을 불안하게 생각한다. 무한으로 이해하면 사람의 들숨과 날숨이나 우주의 팽창과 수축은 다를 바 없다. 우리 우주 너머 무한을 이해할 때 ‘대자유’를 체득할 수 있다.

유한한 세계에서 안다는 것은 지금의 세계를 과거의 정보로 확인하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나를 과거의 나로 가두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것은 무한한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유한한 관계로 한정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결정을 하고 나면 늘 더 큰 세계가 남는다. 결정은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큰 바보’는 똑똑하게 결정하지 않고 세계의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나를 그냥 맡긴다. 똑똑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면 멀리 사라지는 산그리메를 보며 그냥 웃자. 그렇다고 무한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도 무한을 느껴볼 수 있다. 산그리메를 둘러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떠보자. 우리 우주보다 더 깊은 순간이다. 무한에서 순간과 영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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