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타임, 오늘을 다시 산다면
오설자
수필가
살면서 가끔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를 한다. 결정적인 때를 무심코 흘려보내고 아쉬워한다. 안타까운 순간을 같이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시간 여행이란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낸 영화 <어바웃 타임>은 ‘오늘을 다시 살 수 있다면’을 가정한 영화이다. 가족과 사랑, 인생을 이루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준다. 지나간 하루를 다시 살아보는 것,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신선했다. 보내기 아쉬운 기쁨을 다시 누려볼 수 있기에. 잘못된 결 정, 지나치고 사라질 것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행동을 다시 산다면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기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닷가 언덕에 있는 고풍스러운 집.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 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책을 읽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차를 마시거나 물수제비를 뜨며 시간을 보내는 그들 속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잠시 나는 영화를 따라 어린시절로 돌아갔다.
어느 늦가을 오후, 마당에 널어 놓은 풀 바른 바구니들이 따사로운 햇살에 꾸덕 꾸덕 마르고, 농익은 가을 햇살을 가득 품은 빨랫줄의 이불 홑청은 바람에 펄럭이며 마당 가득 비누 냄새를 뿌려놓았다. 잠시 틈을 내어 툇마루에 앉은 엄마는 다리 사이에 나를 안고 머리를 만져주며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내 모습이 엄마의 맑은 눈동자에 들어 있었다. 그때만큼은 온전한 나만의 엄마였다. 바쁜 농사일과 아픈 동생에게 비껴간 사랑으로 나는 늘 엄마의 관심을 갈망했다.
영화는 나를 다시 현실로 데려왔다. 팀이 스물한살 되던 날, 아버지에게서 집 안 내력으로 내려오는 시간 여행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특별한 운명. 이미 많은 아버지들이 돈 때문에 인생을 탕진했으니 욕심을 부리지 말고 평범한 삶을 다시 살아보라고 한다.
팀은 어제로 돌아가 지나쳐버린 것들을 새롭게 본다. 점원의 미소와 따뜻한 인사말도 다시 사는 오늘에서야 알아차리게 된다. 일터가 새롭게 보이고 일상의 평 범한 것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어제와 다른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위기가 닥친다. 세 번째 아이를 가지면 과거로 돌아가 살아 있는 아버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아이와 아버지 중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슬픈 현실 앞에 팀 은 고민한다. 결국 아이를 택하게 된다.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 여행.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 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카메라 앵글은 한적한 바닷가에서 오후 한때를 보내 는 아버지와 아들의 뒷모습을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다시 오늘로 돌아온 팀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딸을 배웅하며 행복 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오늘 이 마지막 오늘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할’ 뿐이다.
우리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다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한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행복이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그 것이 행복인 줄 알지 못한다. 행복을 지키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흘려보내고 만다.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더 진실한 삶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 중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문득 어린 시절, 5일장에 가서 엄마와 팥죽을 먹을 때가 떠오른다. 뜨거운 김 사이로 보이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엄마의 화사한 얼굴. 그리고 저녁을 먹으며 재잘거리던 우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모습. 행복했던 때는 평범한 일상에서 가족과 함께한 순간이었다. 행복은 그리 대단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오늘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노래는 감미로웠다. 하지만 엄마를 떠올릴 때면 내 가슴은 미어졌다. ‘How long will I love you? How long will I give to you? How long will I be with you?’
엄마를 얼마나 오래 사랑할 수 있을까? 엄마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일까?
요즘 엄마 눈빛이 예전 같지 않다. 그리 맑았던 눈에 안개가 내려앉은 듯 세상을 읽는 예지가 장막에 가려져 있다. 생명을 갉아먹는 벌레가 엄마 눈 속에 사는 것 같다. 아기처럼 누워계신 엄마, 매일 한 보따리씩 약을 먹는 엄마. 엄마는 오늘을 살지만 멋진 여행을 하지 못한다.
영화 속처럼 시간 여행이 가능해져서 과거의 어느 ‘오늘’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할까. 좋았던 때로 돌아갈까, 아니면 꿈들이 이루어진 날들로 갈까. 무엇보다도 나는 건강한 엄마와 손잡고 길을 걸으며 수다를 떨고 싶다.
“햇살 좋을 때 담벼락에 이불을 내어 널까?”
“엄마, 저녁에 갈치를 조릴까?”
오솔길에 하얗게 핀 인동꽃을 따서 엄마 입에 넣어주고 달콤한 오늘을 엄마에게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오늘’이 올 것 같지 않다.
오설자 계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지금은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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