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봉은사 | 그 절에 가면 불교를 만날 수 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희생,
봉은사

권중서
문화학자·정견불교미술연구소장

사진 제공 | 봉은사홍보미디어연등 소은희

서울 수도산 봉은사는 “불교란 무엇인가?”의 물음에 “불교란 이런 것이다”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사찰이다. 조선의 배불 정책에 맞서 꺼져가는 법등 (法燈)을 다시 살린 곳. 역사적으로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안락하게 한 곳이다.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편하게 제도’하는 종교이다. 봉은사는 신라 794년(원성왕 10) 연희 국사가 견 성사(見性寺)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면 부처 가 되는 절’이다. 옛 이름에서 선종(禪宗)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후 조선조 연산군 4년(1498) 정현 왕후가 성종의 능침사찰로 절을 크게 짓고 봉은사(奉恩寺)라 했다.

봉은사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 견성사의 상구보리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럼 깨닫고 나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봉은사는 하화중생을 실천한 사찰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기라성 같은 스님들을 배출해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했다. 봉은사는 불교 억압 및 배척에 맞서 불교 부흥에 목숨을 건 허응 당(虛應堂) 보우(普雨, ?~1565) 대사의 순교 정신이 살아 있는 사찰이다. 유림(儒林)으로부터 ‘요승(妖僧)’이란 낙인이 찍힌 보우 대사는 봉은사에서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선교 양종과 스님들의 과거제도인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불교를 기사회생(起死 回生) 시킨 순교자였다.
봉은사 옛 모습(동국대 도서관본)
조선조 성종대에서 중종대에 이르는 70여 년은 법란(法亂)의 시기였다. 탄압과 환속, 사찰과 불상, 불탑, 경전의 파괴 및 훼손과 유생들의 온갖 만행으로 한반도에서 1,500년을 이어온 불교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장보살의 구원의 손길처럼 보우 대사가 봉은사에 나타났다. 보우 대사는 1548년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고, 1551년 선종판사(禪宗判事)로 300여 개의 사찰을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로 만들었다. 또한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5,000여 명의 스님들을 선발해 자격을 인정하고 승과(僧科)를 두어 탄압받았던 불교에 희망의 싹을 움트게 했다.

불교가 되살아나려고 하자 1549년부터 1565년까지 16년간 수많은 유생들 이 상소를 올려 보우 대사를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疎)’를 올려 요승 보우의 처단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로 인해 보우 대사는 1565년 6월에서 7월 사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보 우 대사를 죽이기로 작심한 변협은 1565년 11월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국법을 무시한 채 사사로이 장살(杖殺:몽둥이로 때려서 죽임)하고 그해 12월에 제주목사를 그만두었다. 그때 유림들은 “변협이 보우를 때려서 죽이니 통쾌하게 여겼다”고 했다. 보우 대사의 죽음은 율곡을 비롯한 유림에 의해 저질러진 계획된 살인 행위였다. 불교가 다시 흥기할 것을 우려한 유림 집단에 편승한 율곡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자신을 거두어준 보우 대사의 은혜를 원수로 갚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허응당 보우 대사 동상
보우 대사를 비난한 『명종실록』
율곡이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율곡은 16세(1551년)에 어머니 상을 당했다. 18세(1553년) 때 계모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봉은사에 머 물렀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쓴 「율곡 이이의 행장(行狀)」을 보면 “선생은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항상 밤낮없이 울부짖었다. 하루는 봉은사에 가서 불서(佛 書)를 펴 보다가 생사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또 불교가 간 편하고도 높고 오묘함에 감동을 받아 속세를 떠나 불법을 구하려 하였다”고 했다. 당시 봉은사 주지인 보우 대사는 율곡의 출가를 만류했지만 율곡은 19세(1554년)에 머리를 깎고 의암(義庵)이란 법명을 받고 금강산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율곡은 “만법귀일 귀일하처(萬法歸一 歸一何處)” 화두로 수행했으나 “불교는 참된 학설이 아니다”는 자만심을 지닌 채 20세(1555년)에 하산했다. 하산 후 10년 동안 보우를 죽 여야 한다는 상소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던 율곡은 1565년에 문정 왕후가 죽자 보우 처단의 상소를 올려 정치적인 기회를 잡았다.
평양성 전투도 부분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1565년 동지섣달, 보우 대사는 자신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려는 변협 앞에서도 당당했다. 『허응당집』에 기록된 임종게(臨終偈)를 보면 대사의 깨달음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幻人來入幻人鄕 허깨비 사람이 허깨비 마을에 들어와서
五十餘年作戱狂 오십여 년간 미쳐 광대짓 하였는데
弄塵人間榮辱事 인간 세상 영욕의 세월 놀아 마쳤기에
脫僧傀儡上蒼蒼 꼭두각시 탈 벗고 푸른 하늘로 간다네

『원각경』에 “환(幻)은 원각(圓覺)으로부터 생긴 것이기에 환이 없어져도 각(覺)은 본래 그대로이니 본각(本覺)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우 대사는 임종 게에서 허깨비 같은 몸을 버려 원각으로 돌아간다고 하며 이미 깨달았음을 당당 히 말씀하셨다. 참으로 홀로 오셨다 홀로 가신 불교 중흥의 스승이다.

서산 대사는 『허응당집』 발문에서 “생각건대 우리 대사께서는 백세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셨다. 이 도로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고 끊어지지 않게 하시었으니 이 분이 아니었더라면 영산(靈山)의 풍류와 소림(少林)의 가락이 거의 멈추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상고하여 논하건대,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 가 신 분이라 하겠다”고 대사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했다.

한편 보우 대사는 임진왜란을 예견한 듯 1552년 첫 승과에서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서산 대사(西山大師)를, 1561년에는 송운유정(松雲惟政, 1544~1610) 사명 대 사(四溟大師)를 발탁했다. 이로 인해 서산 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기 허당 영규, 벽암당 각성 등 스님들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 나라를 구했다. 스님들은 경전에서 말한 부처님이 보내신 다섯 대력보살(大力菩薩) 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진실한 불국토를 만드는 일로 여겼다.

봉은사 허응당 보우 대사는 살아서는 꺼져가는 불교를 되살려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셨고, 죽어서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신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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