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미신 | 사유와 성찰

종교와 미신

- 어디까지 미신으로 볼 것인가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 “미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그다지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미신이란 게 무엇이며 우리가 접하는 현상들 중에 어떤 것이 미신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너도나도 어느 정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화에서 그 말을 쓸 때 상대방도 대체로 알아듣고 의미 전달이 나름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대개 미신이라는 개념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면서도 종교로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는 구별되는 그 어떤 믿음과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미신이라는 게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미신이라 하고 무엇은 아니라 할지를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종교학에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다.

어떤 개념이 학술적으로 쓸모 있게 활용되려면 그 의미가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납득될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규정되고 소통되어야 할 텐데, 미신이라는 개념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종교학에서는 아예 미신이라는 개념을 학술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의미 규정이 중구난방인 개념은 학술적 논의에서 주제어로 사용하기 곤란하다. 미신도 그런 개념 중 하나이다. 무엇을, 어떤 것을 가리켜 미신이라고 일컬을지 정색하고 따져보면 그게 참 애매모호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더욱이 미신은 문자대로 풀이하면 “어리석은 믿음”이라는 뜻이니, 가치판단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누군가의 어떤 생각과 행동을 두고 어리석다고 비평하려면 충분히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어야 마땅하다. 특히 그 누구에게는 심각하고 진지한 일인데 그것을 어리석은 믿음이라고 매도하려면 그만큼 충분히 심각하고 진지한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휘 사전이나 백과사전 몇 군데에서 미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들을 모아보았다. 인터넷 시대에 가장 손쉽고 편리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위키백과』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미신이란 과학적 관점에서 헛된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이나 신앙이다. 마음이 무엇에 끌려서 잘못 믿는 것 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것에 대한 맹신을 의미한다.” 이 설명에 의하면 미신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과학적 관점” 또는 “과학적 근거”이다. 그런데 “과학”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좁게 잡든 넓게 잡든 간에 종교 또한 과학적 관점이나 근거와는 영역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이런 규정에 의하면 종교도 미신으로 분류될 수 있다. 지식 생산의 주도권을 과학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게 된 시대 상황이 반영된 규정이지 싶다. 그러나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미신의 기준이라면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에서 미신 아닌 것이 얼마만큼이나 남을지 모르겠다.

한편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판단 기준을 하나 더 제시한다: “1.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으로 망령되다고 판단되는 신앙. 또는 그런 신앙을 가지는 것. 2. 아무런 과학적·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음.” 즉 과학 외에 종교도 판단 기준으로 넣었다. 그런데 종교적 관점이나 근거는 단일하지 않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다양하다는 데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어느 한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종교들의 신앙과 행위는 다들 망령된 것, 즉 미신이다. 실제로 종교들은 각자 자기의 신앙이 참되고 올바르며 다른 종교들은 다들 어리석은 믿음이라는 주장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또한 내면의 신앙과 집단의 결속을 다진다.

위에 언급한 사전들의 설명에 빠진 게 있다. 헤게모니, 즉 사회적 세력에 따라 ‘건전한’ 종교인지 아니면 미신인지 판가름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조선조에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유자(儒者)들 관점에서는 유교 외의 종교는 모두, 즉 무속을 비롯한 민속신앙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도 모두 미신이었다. 하지만 과학을 기준으로 본다면 유교도 마찬가지로 미신이다. 그러니 미신의 기준은 상대적이고 임의적이며 조작적이고 사회적으로 정해지고 활용되는 것일 뿐이지 절대적이고 보편적일 수 없다.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속제(俗諦)이지 진제(眞諦)가 아니다.

무엇이 올바른 믿음이고 무엇이 어리석은 믿음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마디로 딱 잘라서, 게다가 전력을 다해 진심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대개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첫째, 독선적인 주장이다. 둘째, 그 답변을 듣는 사람을 훈육해서 성장시키기 위해 구사하는 방편이다. 둘째의 경우야 스승의 은혜이며 감사할 일이지만, 대개는 첫째의 경우가 난무해 서로 부딪치고 세상을 유치하게 만들며 어지럽히고 시끄럽게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독선은 무지, 어리석음, 유치함이 표출하는 대표 증상이다.

우리가 흔히 미신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현상으로는 점복이나 역술, 무속, 금기, 주술 등등이 있다. 과학이 지식을 주도하는 시대이고 이른바 고등 종교들이 많은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온 지 오래인지라, 그런 것들이 어리석은 신행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민속 전통의 일환으로서 전통문화를 담아 전승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나랏돈으로 보존하고 육성하고 전승하기도 한다. 그것을 굳이 미신이라고 부른다면 어리석은 짓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세금을 납부하는 셈이니 자가당착이다. 그런 민속신앙은 미신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속신(俗信)이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있던데, 일리가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된다.

인류 사회에 널리 전승되어온 그런 속신들, 그것들을 담아 전해온 신화라든가 의례, 사회제도, 관습 등에 대해서 종교학을 비롯해 인류학, 민속학, 사회학, 신화학, 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현대인의 관점과 취향으로 보면 어리석게 보이는 그 행태들이 사실은 인간의 정신세계의 원초적인 구조와 작동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출하고 구현하는 매체이다. 물론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납득이 안 되는 방식도 많지만, 이 이른바 과학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활발하게 작동하고 변용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닿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현대인이라고 해서 첨단 과학 문명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어떻게 믿느냐를 어리석음의 가늠자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위에서 쉽사리 목격할 수 있듯이, 종교인의 믿음과 실천이 종교에 따라서 숭고하거나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원시 종교에도 숭고한 요소가 있는가 하면 고등 종교를 유치한 방식으로 신앙할 수도 있다. 창조주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든, 그와는 기조(基調)가 다른 불교, 유교, 도교든,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공통되는 숭고한 신행과 유치한 신행의 차이를 하나 이야기할 수 있다.

일상의 길흉화복이건 궁극적인 구원이나 초탈이건 간에 원하는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천지신명과 신령님들의 가호라든가 신의 은총이나 불보살의 가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성숙하고 숭고한 신행을 이끌어낸다. 그런 정신의 표현으로 우리가 가장 널리 알고 있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즉 사람이 할 일을 다하면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속신앙에서는 치성(致誠)을 드린다는 게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런저런 일이 달성된다고 하는 단순히 주술적인 신행으로만 보이는 민속신앙이 사실은 신명을 바쳐 지극한 정성을 다한다는 정신을 기조로 하고 있음에 주목한다면, 함부로 미신이라는 딱지를 갖다 붙이기가 조심스러울 것이다.

반면에 어떤 종교에서든지 사람이 할 일은 적당히 하고 초월적인 힘과 존재에게 의지해 쉽고 편히 일을 이루려고 하는 신앙이라면 가히 어리석다고 할 만하다. 특히 기계적이고 계량적인 처방에 혹해 집착하는 것이 다양한 어리석은 행태로 나타난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소원 성취는 헌금, 연봇돈, 불전, 복채 액수에 비례하리라는 믿음이 그 한 예이다.

종교가 인류의 위대하고 숭고한 유산인 것은 우리가 개체 생명체로서 타고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본능과 욕구에 부응해주어서가 아니라, 그런 자연적인 한계를 부단히 초극하는 지혜의 길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신, 어리석은 믿음이라는 개념도 자기 자신의 초극을 검토하고 반성하는 자기 점검에 우선 쓸 일이지 다른 이들의 신행을 비난하는 데에 사용하는 건 삼가는 게 슬기로운 태도이다.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로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 『똑똑똑 불교를 두드려보자』, 『종교와 과학』 등의 공저서가 있고, 『선불교에 대한 철학적 명상』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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