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넘어
엄준섭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석사과정 1학기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여러 종교의 에토스가 공존하는 가정이었다. 어머니는 성당을 다니셨지만, 불교 수행에 관심이 깊으셨던 아버지와 함께 늘 명상을 하셨다. 집 거실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지만,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가족 모두 집 근처 용화사를 찾아 참배하고는 했다.
이런 개인적 배경 때문인지 대학에 들어가서는 비교종교학이나 그 안에서 탐구되는 종교적 경험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경험인 신비적 경험이 개별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고 보는, 소위 ‘보편주의’라는 관점에 관심이 많았다. 이 관점은 고유한 전통과 교리를 지닌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소통할 공통의 토대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내게는 종교 간 대화와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기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고 불교를 전공하면서, 이러한 관점으로 불교를 보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가지게 되었다. 석사 과정 중 어느 절에서 외국인 방문객을 대상으로 통역을 한 적이 있었다. 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외국인 손님들이었는데, 나는 이들에게서 앞서 말한 보편주의적 시각을 여러 차례 발견했다. 이들은 대체로 명상 과정에서 나타나는 의식(意識) 변화에 큰 관심이 있었고, 신비적 의식을 경험하는 것이 -다른 종교에서 그러하듯이- 불교라는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불교의 깨달음도 순간에 경험되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 이해하려 했고, 그 변화된 의식은 다른 종교의 그것과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비종교적 맥락에서 발생한 비일상적 의식의 상태, 예컨대 환각제를 흡입한 사람의 의식 상태 같은 것이 불교의 깨달음에 비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양에서 온 방문객들의 이러한 불교 이해를 접하면서, 나는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마음을 반조(返照)하고 현재의 의식 상태를 섬세하게 알아차리려는 노력이 불교도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의식의 변화된 상태가 곧 깨달음이라거나, 불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순간에 비일상적인 의식 변화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사성제나 팔정도,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가 불교를 바르게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서구인들이 보여준 이러한 불교 이해의 연원을 찾아가던 중, 나는 뜻밖에 한 동양인을 만나게 되었다.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가 바로 그 사람이다. 스즈키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다년간의 서구 생활로 서구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구인들에게 불교를 소개할 때, 서구에서 유행하던 종교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시 서구 종교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신비 경험에 대한 보편주의적 관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스즈키는 이 관점에 따라 불교의 깨달음을 서구의 종교 전통에 나타나는 신비적 경험의 일환으로서 설명했고, 이러한 그의 설명은 서구 사회에서 너른 호응을 받았다.
스즈키가 서구 사회에 남겨놓은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는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의 불교 서술은 분명 동양의 낯선 종교였던 불교가 서구에 정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전통 종교에 대한 일정한 변형과 왜곡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불교를 전공하려는 나에게 스즈키의 사례는 그래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례가 우리 불교 전통을 어떻게 세계에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불교를 더 공부하려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앞으로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잊지 않고 정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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