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복지 3
공장식 축산과 불교
김명식
진주교육대학교 도덕교육과 교수
오늘날 우리가 식탁에서 소비하는 동물들은 농장이 아니라 공장에서 사육된다. 좁은 공간의 축사에 동물들을 가둬놓고 마치 공산품을 찍어내듯이 고기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공장식 축산(factory farming)’으로 불린다. 여기서 동물은 생명체가 아니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인 자동화된 생산 공정의 일부분이다.
현대 농업은 산업형 농업(industrial agriculture)으로, 공장식 축산도 산업형 농업의 한 형태다. 산업형 농업은 전통적인 농업 경영 방식과 다르다. 산업형 농업은 애초부터 판매를 위해 곡물을 경작한다. 자급자족이 아니라 이윤이 목적이기 때문에,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도입해 대규모 토지를 경작하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기계를 사용해 경작하는 방식을 취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고기의 생산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고기 생산이 증가한 것은 1960년대 녹색혁명과 산업형 영농 덕분이다. 이를 통해 곡물 생산이 증가해 사육 동물들도 이것들을 먹고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을 먹는 양, 염소 같은 동물의 생산은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곡물을 먹는 닭, 돼지, 소의 사육은 놀랄 정도로 증가했다. 이른바 ‘가축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공장식 축산의 특징은 대규모로 밀집 사육되고, 외부의 곡물을 먹는다는 점이다. 소, 돼지, 닭의 사육은 대형화되어, 닭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5만 마리, 미국에서는 100만 마리 정도가 되어야 채산이 맞는다고 한다.
산업형 농업과 공장식 축산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장점이 많다. 생산자는 최소의 노동으로 최대의 이윤을 얻을 수 있고, 소비자는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노동시간의 단축과 물질적 풍요라는 달콤한 결실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과거 소수의 부유층만 즐겼던 고기를 일반 대중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 좁은 공간에서 대량으로 사육되는 소, 돼지, 닭은 광우병, 구제역, 조류독감 등 각종 전염병에 취약하다. 한번 전염병이 횡행하면 가축들은 살처분당하고, 집단 매몰당하기 일쑤이다. 이런 살처분은 죽임을 당하는 당사자인 동물에게 가장 치명적이겠지만 인간에게도 부담이 된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동물에게 투여되는 항생제가 상당하다. 이는 결국 고기를 먹는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온다는 점에서 인간의 건강에 위협이 된다. 또 대량 생산된 고기를 소비하면서 발생하는 비만과 당뇨 같은 각종 성인병도 인간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에 들어갈 것이다.
둘째, 생태 환경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공장식 축산을 통해 사육되는 동물들은 풀이 아니라, 농장 외부에서 제공되는 옥수수와 콩으로 만든 곡물 사료를 먹는다. 가축들은 곡물의 2분의 1 이상을 먹는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육식을 포기한다면, 가축들이 먹는 곡식으로 전 세계에 8억 명으로 추산되는 기아선상의 빈민을 구제할 수 있다.
셋째, 동물의 입장에서도 문제가 많다. 조밀 환경에서의 대량 사육은 동물에겐 엄청난 고통이다. 그중에서도 스톨이란 쇠창살에 갇힌 암퇘지, 성냥갑 같은 케이지에 갇힌 산란 닭, 그리고 좁은 축사에 갇힌 비일 송아지의 삶은 악명이 높다. 이들이 느끼는 고통도 문제지만 주어진 삶의 방식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과는 또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중요한 점은 이들 동물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강요된 삶의 방식은 몇몇 악덕 축산업자들의 탐욕에 의해 발생하는 단지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이윤을 목표로 하고, 그래서 생산 비용을 절감해야 하는 산업형 축산에서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과정이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서는 비용 효과적인 방법이 우선적이고, 비용 효과적이지 않은 것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이런 체제에서 동물이 갖는 생명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해줄 여지는 없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중생(衆生), 또는 유정(有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포함된다. 연기와 업에 의하면, 생명은 육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을 윤회하는 존재다.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 소멸하고, 인간계는 긴 여정 중의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있고, 동물도 인간이 될 수 있다. 고대적 사유에서 부처님의 전생은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부처님도 동물이었다는 사유 속에서 동물과 인간 간의 위계와 차별은 해체된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모든 존재가 하나가 되는 ‘연기 공동체’를 지향한다. 불교의 핵심 원리는 중생의 아픔에 함께 연민하고 그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아 자비로써 보살피는 것이다.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인 아힘사는 소극적 의미의 불살생과 해치지 않음을 넘어, 적극적 의미의 보살핌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불살생과 자비는 거의 같은 개념이다. 불살생은 뭇 생명체의 자기 보존 활동을 방해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다양한 욕구와 복지 실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불살생은 나와 다른 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에 기초해, 다른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살생을 실현하기 위해 모두가 육식을 하지 않고, 완전 채식을 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다양한 이념과 종교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다. 고도로 훈련된 수행자들마저 힘겹게 지킬 수 있는 엄격한 윤리와 계율을 일반 대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족한 필자의 소견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또 현대 생태주의가 육식 그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만일 인간과 육식동물, 가령 사자가 사슴 같은 초식동물을 사냥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초원에는 사슴의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어, 남아나는 곡초가 없을 것이다. 생태계는 황폐해져 종국에는 사슴들도 굶어 죽을 것이다. 그래서 생태주의에서는 ‘먹고 먹힘’, 즉 ‘삶과 죽음’은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원리라고 본다. 위(胃)에서 위에로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이 없다면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태주의자들은 육식 자체를 반대하지 않고 그것을 일종의 자연의 이치라고 본다. 하지만 생태주의자들은 공장식 축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동물 사육을 위해 야생 생태계는 옥수수 밭으로 개간되고, 지구 최후의 보루인 아마존까지 위협받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도덕적 식별 능력이 있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재의 공장식 축산은 문제가 많다. 먹고 먹히는 것은 생태계의 이치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까지 동물을 고통스럽게 사육해도 되는가? 싼 가격에 고기를 사 먹기 위해 동물을 평생 좁은 우리에 가둬두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 같다. 동물은 물건이나 식자재가 아니라, 쾌락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그 자체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하지 않을까?
공장식 축산은 인간중심주의와 경제적 효율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인 한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 힘들고, 또 경제적 존재인 한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적 동물이지만 동시에 윤리적인 동물이다. 경제적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한계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합리성을 넘어서 합당성 차원의 고려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공장식 축산이 아니라 유기 축산, 동물 복지 축산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값비싼 유기 농산물을 구매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과 웰빙을 위한 것도 있지만 동시에 지속 가능성 및 도덕과 관련된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경제성을 추구하는 ‘합리적 소비’를 넘어 ‘윤리적 소비’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손실이겠지만, 동물에게는 그동안 그들이 감수해야 했던 엄청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의 건강, 동물의 복지,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둔 소비가 필요한 것이다.
김명식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진주교대 도덕교육과 교수로 있다. 영국 랭커스터대 환경, 철학, 공공정책연구소 연구원을 지냈고, 지금은 국제 저널 『Environmental Ethics』 편집위원이다. 저서로는 『환경, 생명, 심의민주주의』 등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