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2
분노, 세상을 불태우다
이필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불교에서 삼독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 사실 요즘은 욕망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해서 탐욕을 ‘독(poison)’으로 평가하는 불교의 입장에 대해 전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상윳따 니까야』 「연소경(Adittapariyayasutta)」에 다음과 같은 경문이 있다.
“탐욕의 불로, 분노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불로 무엇이 탄다는 것일까? 세상이 불탄다고 말한다. 그 세상은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구성된 세상이다. 우리는 세상이 주어진 것이며,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 과연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여기에 땅이 있다고 하자.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밭이나 논으로 보일 것이다. 건축을 하는 사람에게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대지(垈地)로 보일것이다. 과연 우리는 같은 땅을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안·이·비·설·신·의로 만든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마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이러한 착각을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음(無明)’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우리는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구성된 세계 속에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만든 세상을 불태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법구경』에서는 탐진치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탐욕과 같은 불길은 없다. 분노와 같은 포획자는 없다. 어리석음과 같은 올가미는
없다. 갈애와 같은 강은 없다(.”Dhp.251)
탐욕은 불길로, 분노는 포획자로, 어리석음은 올가미로 비유되고 있다. 탐욕이든 분노든, 어리석음이든 그것들이 힘을 갖는 순간 우리는 이들 번뇌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를 『이띠붓따까』 「탐욕의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탐욕을 끊지 못하고, 분노를 끊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끊지 못하면, 비구들이여, 그는 악마에 묶인 자, 악마의 덫에 걸린 자, 악마가 원하는 대로 하는 자라고 불린다.”
탐욕은 악마의 밧줄에 묶인 것에, 분노는 악마의 덫에 걸린 것으로, 어리석음은 악마의 노예 상태로 비유되고 있다. 결국 이들 경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우리를 속박된 상태, 노예의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 분노에 대한 이야기로 좁혀보자. 부처님께서 분노에 대해서 얼마나 경계하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문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톱으로 도적들이 잔인하게 그대들의 사지를 조각조각 절단하더라도, 그때 만약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맛지마 니까야』 「톱에 대한 비유의 경」)
위 경문은 비유다. 부처님께서도 “이 톱에 대한 비유의 교훈을 항상 새겨라”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사지를 절단당하는 상황에서도 분노를 일으키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우리는 새겨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내와는 다른 것이다. 참는 것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인데, 이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분노를 일으킬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한다. ‘나의 마음은 그것들에 영
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추악한 말을 뱉지 않을 것이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미워
하지 않고 안녕을 기원하며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 사람을
채우리라.’”(『맛지마 니까야』 「톱에 대한 비유의 경」)
부처님을 대자대비라고 표현한다. 그 대자대비는 잘못한 자를 무조건 끌어안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보면 제자에게 호되게 야단치는 모습도 종종 나온다. 제자가 그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진정으로 뉘우치도록 하신다. 그 뒤에 ‘우리는 그대를 용서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분노를 ‘자비로운 분노’라고도 표현한다. 원망과 적개심이 아닌 상대방이 정말로 좋은 길로 가길 염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이기 때문이다.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으로, 자애의 마음으로, 미움을 벗어난 마음으로, 상대를 연민하는 마음으로, 자애의 마음이 가득한 자비로운 분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개심에 물들고, 분노에 사로잡혀 추악한 말을 서슴없이 하며, 상대의 파멸을 기원한다. 듀크대 정신과 의사였던 레드포드 윌리엄스는 “적대감의 정복이란 사고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므로 새로운 행동 양식을 배우고 나서 반복 연습해야 한다. 적대감 정도를 낮추는 것은 모든 적대적 태도, 사고, 행동을 점진적으로 건전한 대응책과 바꾸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말했다.
불교에서 분노를 비롯한 불건전한 정서들은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 ayonisomanasikāra)”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비여리작의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자아에 대한 고집, 견해에 대한 고집’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분노를 느낄 때는 ‘나의 권리가 침해당했다’, ‘내가 모욕당했다’, ‘나의 견해와 다른 말을 한다’와 같은 상황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여 적개심을 나타내곤 한다. 그것은 말로 나타나기도 하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마음속에서 적개심을 키워나간다. 그럼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즉 ‘지금 이런 대우를 받아서,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나에게 분노라는 감정이 올라왔구나’라는 인식이 정확하게 일어나야 한다. 즉 분노가 발생한 사실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념(sammā sati, 正念)’, 즉 바른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반조(反照)’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감정에 대해서 돌이켜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그럴 때 ‘이치에 맞게 성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이미 생겨난 분노에
매인, 이미 생겨난 폭력에 매인 사유(vitakka)를 용인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
리고 없애버리며,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용인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
고 끝내버리고 없애버린다.”(『맛지마 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
사실 분노는 생각이다. 생각이란 자신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세상이다. 우리는 나를 분노케 한 상대를 파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 생각을 바로 알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상황과 자신의 생각에 대해 정확하게 알 때에만 바른 말과 행동과 생각이 가능하게 된다.
“혼란된 사띠로 형체(rūpa, 色)를 보고 나서,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
으로 물든 마음을 지닌 자는 그것에 집착하여 경험하고 머문다. 그 집착된 마음을 지닌
자에게 다양한 형체에서 기원한 감각(vedanā)들이 자라나고, 탐애와 분노가 마음을 파괴
한다.”(SN. IV, 『Māluṅkyaputta Sutta』)
혼란된 사띠(sati muṭṭhā)란 대상과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대상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다. 그렇기에 이런 상태에서 분노가 자라나게 되면 마음이 파괴된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파괴된다는 것은 자신과 대상을 파괴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에 올바르게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십일면관음상에 ‘분노상’이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분노는 상대를 악에서 구원하는 분노이며, 잘못을 고쳐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분노하는 자와 그로 인해 파괴되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의 분노는 폭력을 떠난 분노이기에 상대는 그 분노에 악에 물든 마음을 내려놓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는 부처님이 앙굴리말라를 제도하는 장면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불자는 분노하는 그 마음이 파괴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 그 분노심에 압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잘못된 것에 침묵하거나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는데,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평소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사유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생각에 매몰되는 순간 분노는 다른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이필원 청주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했으며, 일본 북쿄대학에서 ‘아라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성제 팔정도』, 『명상, 어떻게 연구되었나?』(공저), 『인생이 묻고 붓다가 답하다』, 『불교 입문』(공저) 등이 있다. 「초기 불교의 정서 이해」, 「초기 불교의 인성교육적 특성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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