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3
기독교에서 보는 분노
박재순
씨ᄋᆞᆯ사상연구소 소장
기독교는 역사와 생명의 종교다. 기독교는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인간을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 성경의 저자들은 인간의 삶을 객관적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로서 느끼고 체험하고 깨닫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눈동자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사랑과 자비의 신이면서 생명을 파괴하는 불의와 죄악에 대해서는 분노와 진노를 퍼붓는 신이었다.
불의한 역사의 삶에서 우러난 히브리 성경(구약성경)의 분노
토인비에 따르면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수메르 제국이 경직되고 쇠퇴해 창조적 생명력을 잃었을 때 생명의 기쁨과 보람,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새로운 나라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삶의 터전인 땅을 잃고 국가 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 처지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던 이들은 굶주림과 학대를 당해야 했다. 이집트 제국에서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을 학대하는 불의한 권력에 대해 깊은 분노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이들의 원한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쳐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이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다. 불의한 제국의 억압과 수탈에서 해방된 경험은 히브리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히브리 성경의 시편도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시기에 많은 내용이 쓰였다. 시편에는 기쁨과 감사, 찬양의 시들도 많지만 바빌론 제국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적대감을 드러내는 시들도 나온다. 이러한 감정의 이중성과 양면성은 불의한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정복으로 나라를 잃은 백성의 고통스러운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반영한다.
히브리 성경의 시편도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시기에 많은 내용이 쓰였다. 시편에는 기쁨과 감사, 찬양의 시들도 많지만 바빌론 제국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적대감을 드러내는 시들도 나온다. 이러한 감정의 이중성과 양면성은 불의한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정복으로 나라를 잃은 백성의 고통스러운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반영한다.
예수의 자아와 분노 감정의 양면성
예수는 언제나 생명의 중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민중의 심정과 처지에서 생각하고 움직였다. 고정된 자아 없이 밖의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린 존재였기에 그는 늘 흔들리고 움직이는 심정과 영혼의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탄식과 번민을 자주 하면서도 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흔들림 없는 달관에 이른 동양의 도인들과는 달리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불안과 동요 속에서 격동하는 인간들이었다.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바닷속에서 그들은 어린이처럼 아파하고 흔들리면서 생명의 기쁨과 사랑, 주체와 전체의 근원과 중심인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실현하려고 했다.
예수의 분노는 그의 몸과 마음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연민과 사랑은 내부 장기(內部臟器) 창자, 자궁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궁과 창자가 파열할 정도로 터져 나오는 감정이다.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 고민해 죽겠다는 예수는 흔들림 없는 달관에 이른 도통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욕쟁이다.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위선자들을 거리낌 없이 ‘독사의 자식, 여우들, 사탄의 무리들, 거짓말쟁이들, 음란한 세대,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 부르고 적대자들을 향해서 악독과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거침없는 저항의 젊은이다. 그러나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예수, 번민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예수는 한없이 섬세하고 부드럽고 연약하고 예민한 젊은이다.
동서양의 성현들 가운데 예수처럼 분노를 자유롭게 표현한 이는 없다. 예수의 말과 행위를 기록한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가 노여워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더욱이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꾸짖으면서 예수는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고 강제로 그들을 내쫓았다. 예수는 욕설과 분노뿐 아니라 번민, 탄식, 슬픔의 감정을 자주 드러내고 불안과 동요(動搖)를 내보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면서 피와 땀을 흘리며 간절히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십자가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를 남기고 죽었다. 함석헌의 풀이대로 예수의 십자가 절규는 개인의 절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통받는 민중의 절규다. 그는 고립된 개인(ego, person)으로 살지 않았다. 그는 그 시대의 역사와 민중 전체를 몸과 마음에 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자신의 심정과 뜻으로 살았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민중의 삶과 하나로 살았다.
그런데 복음서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도 나타난다. “원수를 사랑하라.”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을 저지른 것과 같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고하면 속옷도 주어라.” “(무거운 짐을 지고) 오 리를 가라고 하면 십 리를 가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눈이 죄를 범하면 눈을 빼버리라.” “손이 범죄를 저지르면 손을 잘라버려라.” 이런 가르침은 매우 단호하고 확실하고 분노 감정을 초월할 뿐 아니라 도통하고 달관한 초인처럼 아무런 동요와 불안이 없다. 이런 예수의 말은 분노를 터뜨리고 불안과 동요를 드러내는 예수의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예수 안에 서로 다른 두 얼굴이 있는 것 같다. 분노 감정을 초월한 예수의 전혀 다른 모습과 가르침을 함께 보지 않으면 예수의 삶과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역설적이고 야누스적인 예수의 삶과 감정은 역사와 사회의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생겨난 기독교의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은 불의한 역사와 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극복하고 정화해 사랑과 정의의 역사와 사회를 열어가는 희망과 열정을 담은 책이다. 예수와 기독교 전통은 불의한 역사와 그 역사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 신앙에 의해서 극복하고 초월해 사랑과 정의의 역사를 열어가는 구도자적 방황과 편력, 좌절과 희망의 과정이다.
예수의 분노는 그의 몸과 마음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연민과 사랑은 내부 장기(內部臟器) 창자, 자궁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궁과 창자가 파열할 정도로 터져 나오는 감정이다.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 고민해 죽겠다는 예수는 흔들림 없는 달관에 이른 도통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욕쟁이다.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위선자들을 거리낌 없이 ‘독사의 자식, 여우들, 사탄의 무리들, 거짓말쟁이들, 음란한 세대,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 부르고 적대자들을 향해서 악독과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거침없는 저항의 젊은이다. 그러나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예수, 번민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예수는 한없이 섬세하고 부드럽고 연약하고 예민한 젊은이다.
동서양의 성현들 가운데 예수처럼 분노를 자유롭게 표현한 이는 없다. 예수의 말과 행위를 기록한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가 노여워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더욱이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꾸짖으면서 예수는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고 강제로 그들을 내쫓았다. 예수는 욕설과 분노뿐 아니라 번민, 탄식, 슬픔의 감정을 자주 드러내고 불안과 동요(動搖)를 내보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면서 피와 땀을 흘리며 간절히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십자가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를 남기고 죽었다. 함석헌의 풀이대로 예수의 십자가 절규는 개인의 절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통받는 민중의 절규다. 그는 고립된 개인(ego, person)으로 살지 않았다. 그는 그 시대의 역사와 민중 전체를 몸과 마음에 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자신의 심정과 뜻으로 살았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민중의 삶과 하나로 살았다.
그런데 복음서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도 나타난다. “원수를 사랑하라.”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을 저지른 것과 같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고하면 속옷도 주어라.” “(무거운 짐을 지고) 오 리를 가라고 하면 십 리를 가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눈이 죄를 범하면 눈을 빼버리라.” “손이 범죄를 저지르면 손을 잘라버려라.” 이런 가르침은 매우 단호하고 확실하고 분노 감정을 초월할 뿐 아니라 도통하고 달관한 초인처럼 아무런 동요와 불안이 없다. 이런 예수의 말은 분노를 터뜨리고 불안과 동요를 드러내는 예수의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예수 안에 서로 다른 두 얼굴이 있는 것 같다. 분노 감정을 초월한 예수의 전혀 다른 모습과 가르침을 함께 보지 않으면 예수의 삶과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역설적이고 야누스적인 예수의 삶과 감정은 역사와 사회의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생겨난 기독교의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은 불의한 역사와 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극복하고 정화해 사랑과 정의의 역사와 사회를 열어가는 희망과 열정을 담은 책이다. 예수와 기독교 전통은 불의한 역사와 그 역사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 신앙에 의해서 극복하고 초월해 사랑과 정의의 역사를 열어가는 구도자적 방황과 편력, 좌절과 희망의 과정이다.
예수의 분노와 생명 체험
생명의 본성 자체가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 생명은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한 것이다. 물질 안에서 물질에 의존해 사는 육체적 존재라는 점에서 생명은 한없이 연약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러나 물질의 제약과 속박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생명은 한없이 자유롭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면서 떳떳하고 한결같은 존재다.
예수의 분노는 생명을 살리려는 의분이었다. 그의 분노는 그의 깊은 생명 이해와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는 친밀한 아버지 같은 이였다. 그의 하나님 체험과 신앙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전체를 하나로 통하게 하는 생명 체험과 일치했다. 생명은 참된 주체이고 참된 전체다. 생명의 참된 주체와 전체는 생명의 창조적 근원과 중심인 하나님 자신이다.
깊은 생명 체험을 한 예수는 생명의 아픔 속에서 깊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고 절절하게 표현했지만, 그의 생명의 깊은 내면에는 기쁨과 자유, 사랑과 평화가 있었다. 생명 자체의 이러한 이중성과 양면성에서 예수의 상반되고 모순적인 모습과 언행이 나온 것이다.
야누스 같은 예수의 이러한 이중성은 그의 생명(역사·민중) 체험이 그만큼 역동적이고 격렬했으며 그의 삶과 생각과 행동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충실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 체험은 기쁨과 자유, 사랑과 정의와 평화인데 불의한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삶은 깊은 슬픔과 분노와 번민을 주었다. 태풍이 일어난 바다처럼 생명의 바다는 흔들리고 요동치는데 태풍의 중심은 아무 움직임도 없이 고요한 것처럼 예수가 체험한 생명의 중심에는 기쁨과 사랑, 정의와 평화만 있었다. 흘러넘치는 기쁨과 사랑의 생명과 그 생명의 중심인 하나님이 있었다. 생명의 바다의 중심(하나님)은 다시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삶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는 사랑과 자비의 님이면서 분노하고 싸우는 님이었다.
예수의 분노는 생명을 살리려는 의분이었다. 그의 분노는 그의 깊은 생명 이해와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는 친밀한 아버지 같은 이였다. 그의 하나님 체험과 신앙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전체를 하나로 통하게 하는 생명 체험과 일치했다. 생명은 참된 주체이고 참된 전체다. 생명의 참된 주체와 전체는 생명의 창조적 근원과 중심인 하나님 자신이다.
깊은 생명 체험을 한 예수는 생명의 아픔 속에서 깊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고 절절하게 표현했지만, 그의 생명의 깊은 내면에는 기쁨과 자유, 사랑과 평화가 있었다. 생명 자체의 이러한 이중성과 양면성에서 예수의 상반되고 모순적인 모습과 언행이 나온 것이다.
야누스 같은 예수의 이러한 이중성은 그의 생명(역사·민중) 체험이 그만큼 역동적이고 격렬했으며 그의 삶과 생각과 행동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충실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 체험은 기쁨과 자유, 사랑과 정의와 평화인데 불의한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삶은 깊은 슬픔과 분노와 번민을 주었다. 태풍이 일어난 바다처럼 생명의 바다는 흔들리고 요동치는데 태풍의 중심은 아무 움직임도 없이 고요한 것처럼 예수가 체험한 생명의 중심에는 기쁨과 사랑, 정의와 평화만 있었다. 흘러넘치는 기쁨과 사랑의 생명과 그 생명의 중심인 하나님이 있었다. 생명의 바다의 중심(하나님)은 다시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삶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는 사랑과 자비의 님이면서 분노하고 싸우는 님이었다.
박재순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한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연구교수와 성공회대 겸임교수를 비롯해 씨ᄋᆞᆯ사상연구회(함석헌기념사업회 관련)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재단법인 씨ㅇ.ㄹ 상임이사 겸 씨ᄋᆞᆯ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다석 유영모-동서를 아우른 창조적 생명철학자』, 『씨ᄋᆞᆯ사상』, 『함석헌의 철학과사상』,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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