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바이러스의 전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 분노 4

분노 4


분노 바이러스의 전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조관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분노조절장애 청소년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를 구별하는 일본의 전통문화에서는 스스로를 절제해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공동체의 덕목이다. 물론 감정의 절제가 일본 사회의 미덕만은 아니다. 18세기 후반의 고전 연구자이자 가객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무라이 정신을 가라고코로(漢意), 즉 중국의 예법이라 여겼다. 대신 여자처럼 서럽게 울 수 있는 감성의 해방을 일본 고유의 문학 정신, 즉 모노노아와래(物の哀)라고 했다. 그렇다고 물상에 대한 비애감이 일본의 전유물일 수 없다. 절제미와 절조가 유교적 왕도 문화에 공통된 동아시아 지배층의 규범이라면, 서민들은 우아한 품격에 구애되지 않는 비속한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상층과 하층의 생활문화가 들쭉날쭉 어우러져 있는 법이다.
 실제 에도 시대부터 상업도시로 번성한 오사카의 상인 문화에서는 교토에 뿌리내린 귀족 문화와 달리 기묘한 감성이나 활달한 표현을 옹호한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최대 연예 기획사 요시모토흥업(1912~)이 오사카에 본거지를 틀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2000년 무렵 요시모토흥업의 희극인들은 만담과 개그 장르에서 분노(기레, 切れ)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 버전도 다양해서 진분노(마지기레, 真切れ), 역분노(갸크기레, 逆切れ,적반하장)라는 캐릭터까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호통 개그’, ‘버럭 개그’로 통한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이 공동체의 규범인 일본에서 분노 연기가 웃음을 사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쓴웃음으로도 넘길 수 없는 착잡함이 밀려온다. 어디에서도 분노 게이지가 너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잘리다, 끊기다’를 뜻하는 일본어 동사가 ‘기레루(切れる)’이다. 2000년 무렵, 그 말이 ‘인내심으로 묶어두었던 끈이 끊어져 화가 치솟다’, ‘혈관이 끊어져 피가 거꾸로 치솟다’와 같은 ‘이성이 끊긴’ 분노 상태를 가리키는 속어가 되었다. 당시 ‘끊겨버린(切れてしまった)’ 상태의 표현은 이중의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기레(끊김)’는 거품경제가 꺼져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던 침체 위기, 그리고 마침 그 시기에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던 청소년들의 행동 양식을 포착하는 중의적 표현이었다.
 1998년 1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만 13세 소년이 26세 여교사를 접이식 나이프로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온순했던 소년은 교사의 훈계에 악다구니를 부리며 덤벼들었다. 일본 사회의 충격과 여파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2000년부터 17세 전후의 ‘기레루 소년 세대’에 의한 강력 살해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고, 학교 폭력과 이지메 문제도 심각하게 번졌다.

‘발달장애’ 어른

 2000년대 일본 사회는 ‘기레루 젊은이’들을 두려워하면서, 애국심에 기초한 도덕 교육과 소년법의 처벌 강화라는 양면 대책을 강구했다. 2000년과 2007년에 연달아 소년법을 개정해 형사처분 연령을 16세에서 14세로 낮추고, 소년원 송치도 11세부터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유기징역의 상한도 15년에서 20년으로 올렸다. 소년들의 ‘이유 없는’ 강력 범죄와 이지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2006년 교육 기본법을 개정했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애국심 교육을 부각한 일본 교육 기본법의 개정을 일본 우경화의 증거로 보도하며 일본 혐오를 부추겼다. 애국심이 청소년에게 왜 필요한지, 애국심이 아니라면 어떤 대안이 유효한지를 찾는 논쟁은 없었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도 14세 이하 촉법소년(觸法少年)들의 집단 폭력과 초등생 살인 사건 등이 일어났다. 그러자 촉법소년의 연령을 12세로 낮추고, 강력 범죄에 대한 소년보호처분을 폐지하고 사형을 집행하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아이들의 폭주 이유를 알려는 노력도 없이 아이들을 혐오하며 감옥으로 쫓아내려는 어른. 죄를 미워하지 않고 죄를 방치한 채, 아이들을 미워하고 그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어른. 그들이 훈육을 핑계로 아이들을 학대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반사회적인격 장애를 일으키거나 아동을 학대하는 사이코패스 부모도 된다.
 일본의 개정된 소년법은 언론의 피의자 실명 보도 금지와 국민들의 소년보호에 대한 의무도 규정했다. 소년들이 보호자의 정당한 감독에 복종하지 않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거나, 범죄자나 부도덕한 자와 교제하거나, 위해한 장소에 출입하거나, 자기 또는 타인의 덕성을 해치는 행위를 하는 경우를 보았다면 가정법원에 통고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는 소년들의 일탈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제시되었다. 하지만 실제 소년들이 쌓아온 ‘이유 없는’ 분노의 이유를 밝히고 씻어내는 차원에서 사회적 보호 의무는 여전히 방치된 채였다.
 분노조절장애를 소년원과 교도소에서 교화시켰다면, 사회는 점차 맑고 투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묻지 마!’ 무차별 살상 사건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불안과 불만을 키우고, 자라면서도 분노의 싹을 녹여내지 못한 인격장애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시국에 아동 학대 사건도 연일 터진다. 우리는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분노 사회에 살고 있다.
 작가 후지와라 도모미(藤原智美)는 2007년 『폭주 노인』이라는 논픽션에서 노인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노인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사회적 분노를 가중시키는 현상을 고찰했다. 고집불통 노인들이 줄서기를 무시하거나 여의사에게 횡포를 부리는 등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은 치매의 징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인들의 분노 폭발이 사회적 불행으로 이어질 징조는 이미 예시되었다. 2016년 일본 자위대 출신의 한 남성은 부인의 퇴직금 탕진과 이혼 재판 판결에 불만을 품고 공공시설에 폭발물을 설치해 살인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한국의 한 노인은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고 숭례문 화재를 일으켰다.
 ‘버럭 분노’ 현상이 중장년과 노년층으로 번지자, 그 분노조절장애를 어른의 ‘발달장애’로 부르고 대처법을 소개하는 전문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한 뇌과학자는 ‘버럭 분노의 중요성’과 ‘기레의 스킬’을 강의한다. 만만하게 보이면 ‘착취’당하는 세상이니 자신을 지키는 수단으로 ‘지혜롭게’ 분노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착해 빠져서’ 상대를 착취자, 사기꾼으로 만드는 젊은이도 많다.
 그렇다면 똑바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네가 착하게 굴어서 상대가 너를 이용하고 있다면, 그건 상대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네 잘못이 된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 지혜로운 자는 바르게 분별해 처신하기 때문에 분노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내가 잘못해서 발생한 일인데 상대에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내 모순을 모르고 남 탓만 하는 꼴이다. 이렇게 모두가 남 탓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면서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이여, 분노하라!”고 쓴 대학교수의 칼럼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어른들이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놓았다면 문제의 해결 방법도 직접 찾아 제시해야 한다.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자신의 기득권과 의무를 돌아보지 않고서 젊은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그 또한 ‘발달장애’ 어른이 아닐까 싶다.
 바르게 성장한 어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젊은이여, 이 사회의 모순을 잘 관찰해 그 해답을 연구하라! 미래 사회의 주인공으로서 선배들의 모순을 냉철하게 분석해 실력을 키워라.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답도 찾을 수 있다. 분노하면 답은 보이지 않는다. 실력 없는 자가 화를 내는 법이다.”

분노의 원인과 해소법

 사회 규범이나 집단 논리에 비교적 충실한 한국과 일본에서 ‘공공의 적’을 찍어내 혐오 여론을 일으키면, 분노의 화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 ‘내로남불’의 편파적인 잣대로 악성 댓글이 몰리고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대립, 반일과 반한의 집단 감정도 이쪽의 입장에서 저쪽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정당화해왔다.
 인터넷과 SNS를 활용한 폭로와 여론몰이가 가능한 오늘날, 과거처럼 직위와 나이, 재력과 인기를 앞세운 갑질 횡포는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정과 형평, 정의가 무너진 사회 모순을 방패막이로 삼아 내 모순을 감추고 자신의 공격성을 정당화하는 ‘사이코패스’들이 늘어가는 형국이다. 누구나 내 잣대로 내게 이로운 셈법을 들이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인권 존중을 배우면서도 상대를 진실하게 존중하며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바보는 화를 내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일본어 ‘기레루’는 “머리가 명석하다(頭が切れる)”는 관용 표현에도 쓰인다. 그렇다면 ‘기레루’라는 신조어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겠다. “똑똑하고 욕심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나 사회 규범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분노를 폭발하는 모습, 행위”라고.
 똑똑한 사람이 뭔가 큰 것을 이루고 싶은데 일이 안 되면 초조해진다. 상대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을 때, 답답함이 쌓인다. 그렇게 불안과 스트레스가 쌓이면 짜증이 나고, 그 압박감이 욱하고 터질 때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결국 똑똑하지만 실력 없이 잘난 척하는 사람이 화를 쉽게 낸다. 화를 자주 내면 몸도 망가진다. 화를 참아도 병이 된다. 화를 삼킨 만큼 삼투압이 커지니, 한꺼번에 폭발하기보다 조금씩 풀어내야 좋다. 결국 나의 환경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예 화를 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된다.
 한국도 2026년부터 65세 이상 노년층이 인구의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100세 시대에 베이비부머들이 화내지 않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인을 혐오하지 않고, 노인이 분노하지 않는 사회, 모두의 연구 과제다.



조관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한 뒤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도쿄대학교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일본사상사를 전공하고 일본의 지방대학에서 재직한 후 돌아와 2010년 9월부터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일본 내셔널리즘의 사상사』, 공저에 『난감한 이웃 일본을 이해하는 여섯 가지 시선』, 『포스트코로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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