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다스리는 불교적 방법들 | 분노 5

분노 5


분노를 다스리는 

불교적 방법들


원빈 스님 

송덕사 주지, 행복문화연구소 소장



사바사바세계(娑婆娑婆世界)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바세계란 참고 견디어야 할 일이 많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왜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을 명확하게 진단하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인 삼독(三毒)의 흐름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근현대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더 삼독의 흐름이 강렬합니다. 이미 어리석은 인류는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되었던 탐욕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이라는 분노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본주의 시대의 물결을 따라 온갖 광고가 인류의 탐욕을 부추겼고, 이 탐욕이 극에 다다른 최근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분노와 혐오에 어리석은 인류는 휩쓸리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역시 이 세계적 조류에서 예외일 순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 남녀 이성 간, 친구 간, 집단과 개인 간의 분노와 혐오는 정말 다양한 형태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는 사바세계를 넘어선 사바사바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분노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점은 분노를 해결하려는 방법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국에 불교는 인류의 고귀한 정신문화인 부처님의 법 속에서 분노를 풀어낼 해법을 제시해야 할 보살의 의무가 있습니다.

분노의 원인

 우리는 삶의 전반에 걸쳐 분노에 시달려왔지만, 아직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노의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분노의 원인을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원인이 ‘내 탓’일까요? 물론 이것도 틀렸습니다! 분노의 원인은 오직 ‘번뇌 탓’입니다.
 삼독심에는 일종의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이 인과관계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치심으로 이는 나와 남을 나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치심은 나 그리고 나의 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탐심으로 이어지는데, 그러나 사바세계에서는 일이 원하는 대로 되기보다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처럼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할 때, 분노는 그것을 성취한 상대와 성취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일어납니다. 삼독심의 인과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치심 → 탐심 → 진심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분명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분노라는 놈의 전략에 속아 남 탓, 내 탓을 하면 점점 더 분노에 사로잡히는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노는 그저 탐진치, 번뇌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패자가 분노를 다루는 방식

 범부는 대개 분노와의 전쟁에서 승률이 낮습니다. 이 승률을 높이려면 분노를 대하는 패자의 방식을 버리고 승자의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이 전환을 위해 먼저 패자의 방식을 살펴보려고 하니 자기 자신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분노는 방화범입니다. 방화범이 악질인 이유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도둑은 보물을 훔쳐서 사용하기라도 하지만, 방화범은 특별한 목적 없이 소중한 것을 모두 태워서 소멸시킵니다. 범부가 항상 분노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방화범의 태도를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훔친 도둑은 보물을 찾기 위해 잡는 것이 당연하지만, 방화범은 보물을 다 태운 뒤라 잡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잡는다고 해도 어차피 패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분노한 후 사후 처리를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이미 마음에 화가 가득찬 상태에서 그 분노를 폭발시켜 주변의 마음에 불을 지른 뒤에 이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백날 노력해봐도 패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분노를 폭발시켜 사고를 친 뒤에 이를 뒷수습하느라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분노의 뒤치다꺼리를 하러 쫓아다녀야 하나요? 분노를 대하는 승자의 태도를 배운다면 패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분노의 화학식 승자의 방식이란 다름 아니라 사전 예방입니다. 이것은 패자의 방식이 사후 처리인 것과 대비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분노의 화학식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수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분노의 원인은 오직 번뇌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번뇌라는 범위는 워낙 복잡해서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떤 번뇌 때문인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노를 한자로 표현할 때 불 화(火)를 쓴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땔감과 온도 그리고 산소가 불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이듯, 분노에도 불안(不安), 불만(不滿), 우치(愚痴)의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분노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불안이란 흔들리는 마음을 뜻합니다. 불안은 다양한 번뇌가 원인이 되지만, 대부분 공통적인 하나의 번뇌가 있습니다. 이는 방일(放逸)이라는 번뇌인데, 깨어있음의 힘이 없이 얼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깨어 있음이라는 사띠(sati)를 또 다른 번역어로 마음챙김이라고도 하는데, 불안함이란 이처럼 마음챙김의 문지기가 부재할 때 번뇌라는 적이 마음으로 침략하기 쉬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즉 불안한 상태는 번뇌에게 너무 쉬운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기에, 불안한 마음은 온갖 번뇌가 춤추기 가장 좋은 무대라고 표현합니다.
 불만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번뇌로 그 자체로 탐욕입니다. 사실 불안함도 대부분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상태라고 본다면, 불안과 불만은 분명한 연결성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우치는 ‘이 분노는 정당하다!’라는 착각입니다. 세상에 정당한 분노는 없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면, 불안과 불만이 마음을 부추겨도 반감과 짜증이 분노로 폭발하는 것을 억제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당함이라는 착각에 설득당하는 순간, 범부들은 거침없이 분노의 폭탄을 터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해악을 끼치면, 자신의 삶과 주변의 존재들에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분노의 화학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분노 = 불안 + 불만 + 우치

승자의 방식 = 사전 예방

 우리가 도둑을 대하는 방식과 방화범을 대하는 방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방화범은 반드시 불을 지르기 전에 잡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가장 위험한 방화범인 분노를 다스리는 방식 역시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럼 사전 예방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마음이 불안할 때의 전형적인 증상들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기억해 미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불안하기만 할 때는 아직 마음에 불이 난 것은 아니기에, 이 불안을 달랠 수만 있다면 폭탄은 터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불안할 때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증상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이 가빠지거나, 얼굴이 빨개지거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 등의 증상들을 통해 불안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불안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문장을 곱씹어보세요.

“불안은 번뇌가 춤추기 가장 좋은 무대다!”

 둘째, 불만이 기승을 부릴 때는 빨리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불만은 보통 불안과 동반하므로, 만약 불안하다면 이런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뭐가 불만이지?’ 만약 그 불만 뒤에 숨어 있는 탐욕의 대상을 찾아냈다면 해결은 한결 쉬워집니다. 정체가 드러난 번뇌만큼 무기력한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렇게 곱씹어보세요.

“이 집착이 분노의 불이익을 감당할 만큼 소중한 것인가?”

셋째, 우치가 이렇게 속삭이기 시작할 때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화내지 않으면 무시당한다!’, ‘이를 참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분노에 물들어 있는 개인에 따라 개인차가 있겠지만, 보통은 불안과 불만 그리고 분노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 우치가 기승을 부립니다. 사전 예방의 핵심은 분노를 알아차리는 것은 불안과 불만 그리고 정당하다는 착각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셋을 상대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긴다면, 최악의 방화범과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는 최상의 전술을 익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불자들과 성인들의 번뇌에 승리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에 정당한 분노는 없습니다.

 불안과 불만은 분노에 비하면 참으로 온건(穩健)합니다. 아무리 강해져봐야 겁 많은 도둑일 뿐입니다. 이성을 잃고 모든 것을 태우는 방아쇠 역할은 정당함이라는 우치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저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착각은 우치하게 만드는 동시에 분노라는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행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분노입니다. 염라대왕이라고 해도 분노만큼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힐 수 없습니다. 무시이래, 중생은 분노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분노가 실체 없는 바이러스와 같다는 점을 본다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분노의 실체는 약하기에 분노의 전략은 좀 약았습니다. 교묘함을 무기로 중생의 마음을 지속해서 속이고 물들이지 않았다면 분노는 생존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분노의 대표적인 생존 전략은 바로 정당함입니다. 세상에 정의로운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로 인해 분노에 사로잡히는 순간, 정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오직 분노의 불에 타서 피해를 본 불쌍한 이들만 남게 됩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핑계로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성불을 막는 장애를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두 가지로 구분하셨습니다. 불만과 불안은 잘못된 세계관으로 일으키는 견혹이 아닌 감정과 본능으로 수혹에 가깝습니다. 수혹은 반복적인 닦음으로써만 제거할 수 있는 번뇌이기에 불만과 불안을 다스리는 것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반면 분노가 정당하다는 우치는 견혹의 영역이기에, 이 잘못된 견해를 인정하고 올바른 견해를 배우기만 한다면 수혹보다 훨씬 쉽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분노에 대한 정견을 지니는 것은 수혹을 교정하는 여정 속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하므로 선행되는 것이 전략상 유리합니다.

 『입보살행론』 「인욕품」에서는 정당한 분노가 없다는 점을 입체적인 관점에서 반복해 강조합니다. 이 정견의 여부가 분노가 폭발하는 데 기름을 부을지, 소화기를 뿌릴지를 결정하는 갈림길이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삶의 여정 속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분노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감정과 본능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반복할 때 분노의 교묘한 속임수를 이겨내고 삶의 시한폭탄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빈 스님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http://cafe.daum.net/everyday1bean)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BBS불교방송』 라디오와 TV에서 <행복한 두시>와 <원빈 스님의 최고의 행복학, 불교>를 진행했고, 지금은 『BTN불교TV』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같은 하루 다른 행복』, 『명상선물』,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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